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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은혜의 연보로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 /  고후 8:10-15


1. 은혜인 연보

오늘도 우리는 예배 중에 연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보를 하실 때에 어떤 마음으로 하셨습니까? 적어도 우리는 내가 연보를 함으로써 세상의 복을 더 받을 것이라든가 아니면 연보를 하지 않으면 내게 큰 손해가 있을 것 같기에 연보를 하신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말씀대로 성도가 연보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복이며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니 연보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 연보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심으로 가난하게 되셔서 성도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나누어 줄 것이 있는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를 하는 그 자체가 복이며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에 보면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고후8:10)이라고 합니다. 연보하는 일에 사도가 뜻을 알린다고 하며, 연보는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합니다. 왜 연보를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들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둘 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은 받아주시고, 가인의 것은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의 안색이 변하였습니다. 왜 동생인 아벨의 것은 받아주시고 자신의 것은 받아 주시지 않는가 하는 항의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가인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가 구약 식으로 양이나 곡물을 가지고 와서 불에 태워 바치는데 동생인 아벨의 제물의 연기는 하늘로 곧게 올라가는데, 내가 드린 제물의 연기는 사방으로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이렇게 바치는데 내게 왜 그러시냐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해석이 정성으로 하였다든가 또는 양을 바쳤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그때에는 그 어떤 예물 드림의 기준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둘 다 자신이 수고하여 수확한 것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벨의 것은 받아 주시고, 가인의 것을 받아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믿음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신 저주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과연 나의 결단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식적으로 알고 동의하고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인가 하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벨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받아 주신 것이며 이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산제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생각은 왜 내 것을 받아주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즉 범죄 한 이후에 태어난 자식들입니다. 그렇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것을 받으실 까닭이 없습니다. 받지 않으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받아 주셨다는 것은 이미 용서 하셨기에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서 하시고 받아드린 사람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죄 아래 오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받으심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함께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연보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받아들여주셨다는 은혜에 참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감사하고 연보를 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인처럼 내쳐져야 마땅한 우리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니 이것이 연보에 참여하는 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 연보에 대한 뜻을 알게 하는데 이 연보를 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보를 하는 것은 사랑을 입은 자요.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2. 연보의 이유

다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1-12)고 합니다. 이 연보를 하는 것이 유익하다고하면서 너희가 일 년 전에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한 일이니 이제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처음 마음에 품었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자기 형편대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요, 할 마음이 없이 억지로 체면을 생각해서 내는 것들은 받지는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연보의 원리를 몇 가지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 마음에 원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과 본인만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있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없는 것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저를 부요케 해 주시면 제가 더 많이 헌금하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금과 은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이 다 주님이 지으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자들로 연보케 하사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은 돈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마음에 감사하여 자원함과 기쁨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담기지 않는 돈은 억만금을 바친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에 보면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23:1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은 결코 부도덕한 행위나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돈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헌금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각종 부정이나 죄악을 허용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그릇되고 부정한 수단으로는 결코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다보니 무조건 돈만 많이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연보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것입니다.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사도들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서 못한다는 말은 아무도 못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받지 않으십니다. 있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대로 한다고 하니 내 쓸 것 다 쓰고서 남으면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마게도냐 교회에 주신 은혜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자원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치도록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난하다고 해서 연보하는 복에서 빼버릴까 싶어서 간절히 청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란 돈이 아니라 마음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돈 많은 어떤 사람이 ‘내가 다 할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다 참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살면서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해외에서 목숨 걸고 사역하는 선교사들 이야기나 또는 사역하기 힘들다는 시골 교회 소식들을 들으면 우리가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얼마나 마음이 가고 기도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들으면 그때는 반짝거리며 합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관심이 안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물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주시는 대로 감당하시기를 바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8:13-14)고 합니다. 이렇게 연보를 하는 것은 여유 있는 자로 곤고케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은 후에 저희가 여유 있으면 또 너희에게 보충하게 하여 서로 균등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균등케 한다는 것이 우리들은 좋습니까? 싫습니까? 쉬운 예를 들어 특목고를 많이 만드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전부다 평균화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 강남에 있는 고등학교의 1등급하고, 시골 고등학교 1등급하고 엄연히 차이가 나는데 그것을 같이 보자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준화보다는 한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어느 재벌 회장의 말대로 차이를 인정하고 차이를 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준화하면 하향평준화가 되어서 다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난 사람 잘난 대로 대접하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접받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연보의 정신은 균등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공산주의도 아니고 무엇을 균등케 하자는 것입니까? 공산주의는 이론과 법으로는 똑같이 균등케 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균등케 되는 것입니까? 주의 성령이 임하여 은혜로 균등케 되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에 담긴 뜻입니다.


3. 균등케 하심

성령이 임하여 은혜로 균등케 되는 일이 사도행전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3-47)고 합니다. 또 사도행전 4장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4:32-35) 성령의 역사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성령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대개 성령을 받는다고 하면 능력 받아서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인데 자기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게 하시는 성령을 누가 받기를 원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출16:16-20) 만나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령한 양식입니다. 그러니 많이 거둔 자도 적게 거둔 자도 남거나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둔 것입니다. 모세가 아무든지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고 하루분만 거두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매일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여 남겨 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보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하루분만 거두어 왔을 것이고, 많이 거두어 온 사람은 적게 거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5)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이 말씀을 사도 바울은 성도의 연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로 본 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것은 다 하늘로부터 주어지고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을 하늘의 것을 맡은 청지기로 믿는다면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도 안에서 이런 은혜의 일이 나타난 것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이런 은혜가 고린도교회에도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집 안의 쌀독의 쌀도 오래두면 벌레가 생깁니다. 그런데 매일 썩는다면 하루 양식만 두게 될 것입니다. 정말 좋은 양식, 방부제 없는 음식은 요즈음 같은 상온에 한두 시간 만 있어도 상하고 맙니다. 그러니 냉장고를 개발하고, 김치냉장고도 개발합니다. 이 세상은 계속하여 많이 쌓아두려고만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처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런 삶은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균이 됩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이길 수가 없기에 그러므로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의 생명임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에 우리의 영혼을 주께서 도로 찾으신다는 자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룩한 산제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할 때 말씀하는 그 믿음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성도가 연보를 하는 것이 하는 자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우리의 연보를 할 마음이 있는 연보만 받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부도덕하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얻은 것을 받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나 모든 성도가 연보에 함께 참여 하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바울이 연보로 균등케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7. 바울이 이 연보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말씀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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