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2,131
오늘 : 165
어제 : 224

페이지뷰

전체 : 78,746,037
오늘 : 820
어제 : 994
조회 수 149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주의 영광을 위한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

본문 / 고후 8:16-24

 

 

1. 샤머니즘 기독교

지난주에 설교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연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보를 할 때에 적어도 이 연보를 함으로 내가 복을 더 받을 것이라든가 또는 연보를 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볼 것이기에 연보를 하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너무 간단하게만 생각하고 넘어간 것 같습니다. 왜 이 말씀을 다시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했는가 하면 어느 외국인 교수가 우리나라의 무속을 30년 연구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 상황과 연결시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 가는데 대부분 자영업자들이나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시장이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은밀하게 무당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명한 무당은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이 나라의 최고 상류층만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무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앙입니다. 무당은 이 우리나라에 그 어떤 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 샤머니즘의 바탕에서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종교의 대세가 그때마다 바뀐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변하지 않고 흐르는 제일 아래층의 신앙은 바로 샤머니즘이며 무속신앙인 것입니다. 무속신앙의 특징은 신에게 정성을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바칠수록 많은 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게 바치면 적은 복을 주고, 바치지 않으면 저주하고 해코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성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옛 본성의 속성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봄에 총선을 통해 우리 지역을 대표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였습니다. 그들이 국회의원에 선출되기 전에는 얼마나 깍듯하고 반듯하고 겸손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잠깐이고 당선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출된 지역구에서 일을 할 때도 너무나 다르게 일합니다. 자기를 많이 지지한 동네는 민원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적게 지지한 동네는 나중에 처리를 하는 식으로 일처리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높은 자리에 가면 주변의 모든 좋은 자리에는 자기 사람을 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천받기 위해 또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가는 것이 우리의 심성에 무속신앙이 흐르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과정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내가 잘될 수만 있다면 무당에게 굿이라도 해서 남을 해코지를 하여 이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성을 종교전문가들이 왜 눈치를 채지 못하겠습니까? 이러한 무속적인 심성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또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자극하여 나온 것이 바로 사이비 불교와 사이비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적이다 무속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신학교수가 와서 한국의 성령운동은 샤머니즘적이라고 해서 한때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이러한 무속적인 모습은 성경을 읽을 때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성경을 읽기는 하는데 내용은 늘 이런 식입니다. 십일조 말씀을 해도 말라기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식의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는지 아니 주는지 시험을 해보라고 하였다고 하면서 바쳐서 복 받은 사람의 간증을 늘어놓고 바치지 않아서 저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에 성경에 말씀하는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분명한 사실도 무시한 채 그저 복과 저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이런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하나님의 바른 복음을 듣고 나서 하나님께 헌금을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을 더 하지 않게 되더라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복과 저주가 헌금에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감사해서 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지지는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말씀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바로 우리의 심성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정도가 되다 보니 오늘날의 기독교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알면서도 바르게 돌아서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래가지고 교회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목회자 사례나 받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자기 행위에 따라 복과 저주가 오가는 것처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전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보다 더 좋아하고, 더 열심을 내고, 더 힘껏 헌금도 하고, 주일과 수요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의 숫자가 더 많아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형편인 것입니다.

 

2. 세 사람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고 말씀 하십니다. 바치면 복 받고 안 바치면 저주 받는다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로 가난해지시고 어느 정도로 낮아지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0장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하러 왔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신의 아들 둘을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분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서로 높으냐며 다투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의 힘 있는 집권자들은 임의로 권세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 힘 있는 자에게 줄을 대서 자신도 잘 되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뇌물이 성행하는 것을 무속신앙과 연결고리로 본 것입니다. 무속신앙은 결국 힘 있는 신에게 정성을 바치고, 뇌물을 바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들도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자에게 붙어서 높아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샤머니즘 신앙과는 극명한 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성경을 말하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말하면서 우리가 많이 바치면 많은 복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복음이 싫고 낯선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이해하기도 싫다는 것입니다. 그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입니다. 정성 바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직 온갖 복을 받아내는 비결이 담긴 책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성경에서 연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연보도 엄격히 따지 보면 돈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연보란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았음을 알기에 그 받은 은혜를 나누는 차원과 믿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거저 받았기에 거저 내는 것이 연보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연보란 낼 수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교회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으로 자원하여 힘에 지나치도록 연보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특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처럼 바쳐서 복을 받는 다는 그런 모습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연보를 내는 그 자체가 이미 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고후8:19) 바울은 연보를 하는 일이 은혜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에서의 은혜는 설교를 듣고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설교도 듣는 자기들 마음에 들어야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연보를 하고 그것을 모아서 가난한 교회로 가져가는 이 모든 일도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봉사하는 모든 일이 다 은혜의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16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고후8:16-17)라고 하여 고린도 교회를 다녀와서 바울에게 소식을 전한 디도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바울과 같은 간절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간절함이 디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간절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권하고 디도가 자원함으로 나아간 모든 것이 다 자기부인이 되고 주님의 일하심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18절 이하에 “또 그와 함께 그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그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8:18-21)고 하여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데 아주 신실한 한 사람이 나옵니다.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동일한 주의 영광과 사도들의 원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보를 하고 거두고 운반하는 것도 다 은혜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2절에 “또 그들과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 이제 그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간절하니라”(고후8:22)고 하여 또 한 사람의 이름 없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으므로 더욱 열심을 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이 고린도교회로 가서 연보의 일을 마무리 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의 자랑의 증거를 보이라고 합니다.

 

 

3. 주의 마음으로

그러면 이 은혜의 일, 연보의 일에 왜 이렇게 신실한 세 사람이나 보내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고후8:20-21)고 하여 이 은혜의 일, 연보의 일로 인하여 아무도 훼방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에게는 여러 가지 훼방이 있었습니다. 연보를 거두어서 착복한다는 그런 소리들도 들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주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일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혹 작은 일로 말미암아 오해를 하고 미워하는 죄의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심할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사람 세 사람을 고린도 교회로 보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은혜로 하는 일들에도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은혜로 해 놓고서 육체로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재정 규모가 작고 한눈에 다 보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재정의 일에 우리 모두는 다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몰라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 안 됩니다. 관심을 가지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연보한 것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심을 가지고 아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내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연보를 거두고 운반하는 사람 또 누가 연보의 일로 오해하여 시험 들 수 있고 그리고 그렇게 연보가 훼방될 수 있기에 훼방이 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그런 성도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 이 모두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은혜의 일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1-4)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 사랑, 위로, 교제, 긍휼, 자비 이 모든 것들이 다 은혜의 일들입니다. 그런데 권면하다가 싸우고, 교제하다가 삐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으로 하지 말고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할 때에, 즉 은혜의 일이 나타날 때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무속신앙적인 기독교신앙에서 벗어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보도 믿음으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 할 바를 다 했다가 아니라 그 연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연보 때문이라도 다툼이나 낙심되는 이웃은 없는지도 살피면서 오직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사랑으로 매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그 어떤 종교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들의 신앙은 무엇이며 또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2.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기복신앙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세상 사고방식이 무속신앙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그런 무속신앙과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4. 연보가 내는 그 자체로 복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바울이 이 은혜의 연보의 일에 세 사람씩이나 동행하게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에 연보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은혜의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7. 은혜의 일을 할 때 가장 은혜롭게 할 수 있는 성경의 추천 방법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5 7월 26일 / 갈라디아서 14. (갈 4:8-11) 어찌하여 그때로 가느냐 관리자 2020.08.01 83
594 7월 25일 / 히브리서 38. (히 10:10-18) 영원한 은혜 관리자 2021.07.24 101
593 7월 24일 2부 / 바울의 자랑과 바울의 상 17 관리자 2011.07.24 2319
592 7월 24일 1부 /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관리자 2010.07.24 1511
591 7월 24일 / 로마서 46. (롬8:18-25) 보지 못하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관리자 2016.07.22 286
590 2022 7월 24일 / (갈2:20)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관리자 2022.07.24 302
589 2023 7월 23일 / 요한복음 11. (요 2:13-22) 예수님의 열심 관리자 2023.07.23 11
588 2023 7월 23일 / 요한계시록 21. (계 6:3-4) 둘째 인 관리자 2023.07.23 8
587 7월 22일/ 마가복음 12. (막 2:6-12) 예수님의 죄를 사하는 권세 관리자 2018.07.21 153
» 7월 22일 2부 / 주의 영광을 위한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 2 관리자 2012.07.22 1490
585 7월 21일 / 마가복음 61. (막 10:41-45) 인자가 온 것은 관리자 2019.07.20 124
584 7월 20일 / 사도행전28. (행7:37-45) 모세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12 관리자 2014.07.19 1065
583 7월 1일 2부 / 우리는 무슨 근심으로 살아갑니까? 212 관리자 2012.07.01 4149
582 7월 1일 / 마가복음 9. (막 1:32-39)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더라 관리자 2018.06.30 127
581 7월 19일 / 사도행전77. (행26:1-8) 소망을 말하지만 다른 소망을 꿈꾸는 자들 관리자 2015.07.18 443
580 7월 19일 / 갈라디아서 13. (갈 4: 1-7) 때가 차매 종에서 아들로 관리자 2020.07.19 174
579 7월 18일 2부 / 의로우신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룩과 의의 신앙 관리자 2010.07.17 1298
578 7월 18일 / 히브리서 37. (히 10:5-9) 한 몸을 예비하심 관리자 2021.07.24 84
577 7월 17일 2부 / 오직 복음을 위하는 바울의 변명 관리자 2011.07.17 1863
576 7월 17일 / 로마서 45. (롬8:17-18) 믿음의 사람들이 만나는 현재의 고난 관리자 2016.07.16 255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