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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육신에 속하지 않은 우리들의 무기

본문 /  고후10: 1- 6

    

1. 꿈꾸는 무기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순간이 전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전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싸움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싸움이기에 영적인 전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런 전투를 해야만 하는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무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세상에서 말하는 무기나 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의 무기를 생각하는 방식으로 영적인 무기도 미루어 짐작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이라고 여기는 무기들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적인 무기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고자 합니다. 예전에 한 동안 세상에서 시끄러웠던 내용이 북한의 미사일 이야기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미사일은 우리나라의 안보도 지켜준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지켜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과 통일이 되어서 한 나라가 되고 핵무기를 가지게 되면 이웃의 다른 나라가 함부로 어떻게 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북한과 남한이 일본의 도발에 맞서 힘을 합하여 핵무기를 발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일본이 도저히 막아내지를 못하는 첨단 핵탄두가 실린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은 일본을 위협하기는 하지만 일본의 본토를 강타하지는 않고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를 날려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이 많이 팔린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 속에는 그런 힘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이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 오늘 예수님을 믿는 다는 우리는 어떤 힘을 가지고 싶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인데 어떤 힘과 어떤 무기를 갖추어서 세상을 이기고 싶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예전에 유명한 목사님이 집회를 할 때 잠실운동장에 십 만 명이 모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부흥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모인 회중들이 아멘이라고 하니 그러면 회개하라고 합니다. 회개해서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이 이 나라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그렇게 회개하고 부흥하여 무엇이 되고, 어떻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까? 이 땅에 강대국과 같은 힘을 원하는 것입니까? 어떤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미국을 축복하셨다고 그래서 미국 편을 드는 것이 하나님 편이고,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까지 합니다. 무슨 힘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경제력과 무기를 갖추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나 고린도교회나 바로 이런 힘을 갖추고 싶어 하는 마음과 본성이 있기에 거짓 선생들의 유혹의 말에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2. 육체대로의 싸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사도는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10: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10절에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고후10:10)라는 것 때문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말이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긴다고 여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 같은 죄인을 그렇게 오래 참아주신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난 바울이기에 그런 주님을 증거 하는 자로서 사람들을 만날 때에 온유와 관용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바울임에도 그의 편지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는 것은, 그들과의 만남이 심판의 만남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2절부터 보면,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10:2-3)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약하고 보잘 것 없기에 이런 비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능력들을 과시하면서 보통사람들은 감히 따라 올수도 없는 경지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힘과 무기를 내세워 다르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 12절에 보면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자기 스스로 칭찬하며, 자기들 스스로 비교하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자들인데도 바울은 육체대로 행한다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목사님하면 어떤 모습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습니까? 목회자는 화장실도 안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화장실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종교적인 심성은 똑같은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라는 이름으로 신과 인간 사이의 대리자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우리가 육체에 있다고 합니다.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체대로 싸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설교를 시작하면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세상에서의 싸움은 힘의 싸움입니다. 힘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취하는 것이 육체대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명예일 수도,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과 싸울 때 내가 내 보여서 힘이 될 만한 모든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적인 힘은 무엇이겠습니까? 보통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신기한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함부로 따라 올 수 없는 고행과 기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신들을 신성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육체적인 싸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 사단의 역사로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보고 좋아하고 따르는 자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낸다고 광고한 적이 없습니다. 기적이 일어날는지 자기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때그때 시키시는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는 중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는데 바울이 주목하여 보니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네 발로 일어서라고 하니 일어서버린 것입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놀라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왔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 즉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말을 하기에 허메 즉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제우스 신당의 사제들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제사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들어가 소리를 지릅니다.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4-15)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도 똑같은 성정을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에게 이런 능력이 나오고 또 주변 사람들이 그런 자신에게 몰려들어 위대한 종이라고 치켜세우며 따르려 한다면 과연 누가 바울처럼 자신의 옷을 찢고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이라고 드러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꾸만 자신을 신성화 시키려고 옷도 다르게 입고, 목소리도 다르게 하고, 걸음걸이도 다르게 하고, 보통 사람들은 따라 올수도 없는 금욕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을 바울은 육체대로 싸운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3.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모습

그러면 육체 가운데 있으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여 바라볼 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고 합니다.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로 나온 믿음이 이렇게 일어나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육체대로 싸우는 모습과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모습이 비교가 되십니까? 한 사람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여호와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지만 그 바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으나 역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리면서 기름을 부을 자들을 말씀하시고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싸워서 이겨야 하는데 무엇으로 이기고 싶은 것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폼 나게 세상을 이기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놀리는 자들은 태풍으로 날려버리든지, 지진으로 삼켜 버리든지, 불로서 태워버리면 감히 예수 믿는다고 욕하는 자들이 없을 텐데 그렇게 싸우고 싶은 것입니다.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졌던 사도 요한도 한때 예수님과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 지방의 마을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살라버리기를 원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육체대로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으로 싸우는 것입니까? 4절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10:4-5)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자신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강력한 무기, 즉 마귀의 견고한 진을 부수어버리는 그 무기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모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 십자가 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능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고 약하다고 버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무기란 세상에서 볼 때 아무런 무기도 안 되고, 힘도 없는 그래서 사람들이 싫다고 침 뱉고 고개를 가로저은 그 십자가의 복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이론들이 다 있습니다. 종교가들의 이론, 철학자들의 이론, 과학자들의 이론, 경제학자들의 이론, 정치하는 자들의 이론, 일반 사람들의 이론들이 다 있습니다. 이 이론들은 한 마디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있는 이론입니다. 모든 이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다 스스로 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을 다 부수어 버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우리의 모든 이론을 다 무너뜨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이 복음에 공격당하여 무너져야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갖추어야하는 무기도 역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제대로 복종을 하였습니까? 6절을 보면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10:6)고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가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대하면 주의 재림 때의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아니하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복이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동시에 성도의 무기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 무력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며 무기임을 잊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길 넉넉한 무기가 가진 자들로 삽니다. 힘이 없고 무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이 그리고 우리의 불신앙이 우리로 하여금 무기력하게 무너지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의 거룩한 복음으로 우리 자신이 무너지고 또 그 무너짐으로 주께 복종함이 우리의 강력한 무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어진 그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김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돌려 돌리게 되는 우리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날 우리들이나 고린도 교회가 거짓 선생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바울이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 자신을 반대하는 고린도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온유함과 관대함으로 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이 세상에서 육체대로 싸운다는 것의 의미와 또 그것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바울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으로 싸우지 아니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5. 육체대로 싸우는 자와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자에게 나타나는 대표적 차이는 무엇입니까?

6. 믿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무기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우리가 참 복음을 들었다면 마땅히 나타나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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