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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육신적인 자랑과 주 안에서의 자랑

본문 /  고후10:12-18


1. 성도의 자세

우리가 어려서 거닐던 신작로라고 하는 동네의 가장 큰 길과 또 우리가 다녔던 예배당이나 학교는 우리의 기억 속에는 아주 넓은 길과 큰 건물이었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 찾아가보면 그렇게 넓어 보이고 커 보이던 길과 건물이 참 작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길이나 예배당 건물 그리고 학교가 그때는 넓고 컸었는데 지금은 작아진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커짐에 따라 보는 시각과 기준이 달라져서 그런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사무실에서 작은 그림액자가 하나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이 똑바르게 그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피사의 사탑은 공사 중에 지반이 내려앉아 탑이 기울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그 경사도가 조금씩 더해 져서 거의 5미터나 기울어져 있는 탑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울어진 탑을 똑바른 것처럼 그려 놓으니까 주변에 다른 모든 건물들이 도리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양세가 된 것입니다. 결국 기울어 진 것은 피사의 사탑 하나뿐인데 그 탑을 바르게 그려 놓으니 다른 건물들이 기울어 진 듯 한 그림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비뚤어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실상 보면 내가 똑바르지 않은데도 내가 나를 볼 때 옳다고 여기면 내 주변에 바른 것조차 다 똑바르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늘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보다는 언제나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좋게 보는 것이 우리의 본능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준을 자기중심 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내가 최우선인 것입니다. 가족과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조차 나를 좋게 해주어야 좋은 주님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모든 기준을 자기를 중심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살고 있다고 하면서도 율법에만 기준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남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를 하니 다른 사람이 잘 못하는 것으로 보이고, 자신은 잘하는 것으로 보여서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랑할 것이 많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이런 바리새인들의 자랑이 나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고 합니다. 이런 바리새인과 같은 자가 바로 바울사도 자신이었습니다. 여기의 바리새인은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기를 자랑하지만 바울사도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바, 그것도 율법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여기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사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사도는 남과의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왜 피곤한 인생이 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남과 비교를 하면서 살기 때문에 피곤한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족하면서 살면 되는데 늘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보기에 늘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주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중 주님을 만나고서는 삼일동안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제자인 아나니아라 하는 자가 주의 지시를 받고 안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9:17-18)고 합니다. 그렇게 안수하자 그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보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충만케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사도바울은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바리새인으로 얼마나 남과 비교하면서 살았겠습니까? 율법을 알면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나 율법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은 저주 받은 인간으로 취급하였는데 이제는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어서 이방인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방인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교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1-5) 남에게 판단 받는 것도 매우 작은 일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집에 있을 때는 대충 입고 있으면서도 밖에 나갈 때에는 왜 꾸며서 나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남과 비교를 하기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아십니까? 바울사도는 남의 판단이 너무나 작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나도 나를 판단치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은 의식하지 않아도 늘 자기 속으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일은 했어야 하는데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스스로 판단하고 비교하고 자책하고 합리화하여 결국은 자신을 의로운 자로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지체들이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낙심할까 돌아보시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돌아봄은 자신을 위한 돌아봄이 아니라 지체를 살리고 세우기 위한 사랑으로 말미암아야만 바른 것입니다. 자신을 신앙이 괜찮은 자로 이웃 가운데 드러내기 위한 돌아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을 자책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주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은 모든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실 주님께 맡길 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2. 기준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10:12)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들은, 바울사도가 고린도 교회를 떠 난 후에 예루살렘에서 유명한 자들의 추천장을 가지고 온 지도자라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남을 깎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답지 않다고 트집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자들의 기준은, 언제나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 축에 스스로를 끼어 넣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척도로 자기네 스스로를 재고, 자기네가 세운 표준에다가 자기네 스스로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고후10:12/ 표준 새 번역)고 합니다. 그들이 비교하는 기준이 자기들이 만든 척도와 자기들이 만든 표준으로 비교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로 이 어리석은 자들이 오늘 우리들이며,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의 모든 인간들인 것입니다. 누가 더 선한가를 비교하며, 누가 더 아름다운가를 비교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제각기 다른 것입니다. 목이 길어야 미인 대접받는 곳에서는 목에 사슬을 끼워서 목을 늘입니다. 악한 자들은 누가 더 악랄한 짓을 잘하였는가를 가지고 영웅 대접합니다. 이런 모든 세상의 기준들과 척도들을 다 부수어 버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인 것입니다. 모든 높아지고 교만한 생각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부수어지고 깨어진 자는 다시는 자기를 남과 비교할 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시껄렁한 것 몇 가지를 가지고 자기를 내세울 처지가 못 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여야 믿음인데도 우리는 도토리 키 재는 식으로 누가 더 잘했는가, 못했는가를 따지고 성과급을 나누는 모습이 세상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은혜를 받아 믿는 자들은 그런 삶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10:13-14) 외모를 따라,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자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참된 종은 그 기준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눠주신 분량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분량대로 한다는 것은, 자신들이 고린도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이 뜻에 순종한 것일 뿐이지 그 한계를 넘어서 자신이 많이 개척하고 늘렸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도 보면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2:7-9)고 합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한 것이 자기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한계를 따라 행한 것일 뿐입니다. 로마서 15장에서도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5:16-21)고 합니다.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하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일에 사용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다고 합니다. 이것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또한 주의 소식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3. 우리의 자랑

그런데 지금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15절입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고후10:15-16)고 합니다. 이 말씀도 새 번역으로 보면 “우리는 주제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남을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어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고후10:15-16 / 표준 새 번역) 남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자기의 공로인양 자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일입니까? 무언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면 자기의 공로를 부각시키면서 남의 수고는 무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책망 받을 일 같으면 자기의 잘못은 최소화하고 남의 잘못을 더 크게 부풀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늘 일어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은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해놓고서 주님의 이름만 부른다고 자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즉 그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불순종하고 자기만 자랑하고 자신만을 기준으로 살았는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사라지면 우리는 늘 자기중심 적이고 그래서 자기 자랑과 이기적인 삶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항상 교회에서 이런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 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이방인 백부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런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개가 먹듯이 자신이 개와 같은 자임을 아는 모습이 주님이 칭찬하시는 모습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중에 나사로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입니다. 만물의 찌끼와 같은 대접을 받은 사도바울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일체 자기의 자랑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비교와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않고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겉으로의 그럴 듯한 말이 아니라 우리 심중에 진심 말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이 우리 모두의 자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세상에서는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은밀히 보시는 주께서 갚으실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주만 바라며 사는 주바라기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나 이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비뚤어지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이웃을 의식하며 살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살아야 한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3.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어리석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남들과 비교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바울은 복음 전파에 대하여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6. 주님 안에서 자랑하는 자와 그렇게 않은 자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7.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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