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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버지께서 주신 일을 위해 오신 예수님

본문 /  요17: 4- 5                


오늘은 본문 4절에 있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참 의도를 살펴봄으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그 어떤 일을 행하시더라도 하나님께서 시키시지 않은 일이 없고 또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혼자 독자적으로 행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우물가에 나온 여인과 대화하신 후에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여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미 먹었다'고 말씀하신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자 '누가 언제 잡수실 것을 갖다 주었습니까?'하고 제자들이 되묻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그의 생애를 마치는 맨 마지막 고백으로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4절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는 말씀의 이 일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원하시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앞에 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신자를 그 죄와 파멸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영광된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받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입니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10:6-7) 예수님의 등장을 구약에서 예언하고 묘사하였던 것이 이제 신약에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구약의 예언이 그대로 응했으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시려 하였던 일들이 그대로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내가 왔나이다'는 이 대목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어떤 일도 아버지께서 시키지 않으신 일이 없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일이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시편40편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1-8) 여기서 특히 주께서 내게 행하신 기적도 많고 생각도 많으신데 특히 6절 이하에 있는 말씀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러 오셨고, 아버지의 기뻐하심대로 그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 신약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여기 시편 40편의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고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지라 그래서 그 때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라는 이 고백을 좀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시편 51편으로 가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일

시편 51편에 보면 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는 큰 범죄를 하나님 앞에 저지른 후 나단 선지자로부터 지적을 받습니다. 그 지적 앞에 다윗이 회개하고 지은 시라는 것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3-5) 다윗은 죄라는 것이 우리의 뿌리이고 본성이라는 것을 깨우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인간이 가진 어떤 종교성과 방법으로는 씻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는 그는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바로 이것이 기독교 다른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무슨 제사를 드리거나 예물을 드리는 종교적인 행위 그 자체로는 우리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재창조되어야 하며 중생해야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속으로부터의 근본적인 재창조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근거가 되어 시편 40편이 쓰여진 것입니다. 다시 시편 40편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시40:1-2) 말하자면 다윗은 범죄 한 이후 사람이란 무엇이냐,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그 뿌리부터 흔들려 버렸습니다. 사람이 잘 한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는데서 아주 자신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 나는 네가 모욕하는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 앞에 가노라'하면서 물매 돌로 그를 죽입니다. 그 후 사울 왕이 그를 미워하여 잡으러 쫓아 올 때에 도망 다니면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고 그냥 놔두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부인을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죄 덩어리인가 하는 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기가 막힌 웅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제사를 원하거나 번제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기 시편 40편 7절에 있는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문맥 자체에서는 여태껏 신앙에 대해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다윗의 그 생각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도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라는 문제에 하나님의 답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언제 너보고 선을 행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나는 번제를 요구한 적이 없고 제사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저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여태까지 생활해 온 것으로 볼 때에 이런 생각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열심히 성실하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합격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남의 부인을 뺏는 자리에서는 그 끔찍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가 범죄를 할 줄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와서 비유로 어떤 사건을 설명할 때, 다윗은 그를 죽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는 갑자기 바로 당신이 그 부자라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자기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부인은 분명히 한 두 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집에 하나밖에 없는 부인을 뺏고 그 남편은 전쟁터에서 맨 앞장을 세워서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가 범죄 한 줄을 모르고 이 지적을 받고서는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야 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하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려야 될 것인지, 선행으로 갚아야 할 것인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언제 내가 너에게 선행과 의를 요구하였더냐? 내가 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뿐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타협하시고 방치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죄인을 깨끗케 하셔서 부르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말씀 앞에서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라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필요한 것은 깨끗한 행실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해 통회하고 뉘우치는 마음입니다. 그런 다음에 기초부터 새롭게 되어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40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오늘 본문에 이르러 예정되고 예언된 그 말씀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엄청난 복음의 사역을 성취시키시려 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일이란, 이 땅위에서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간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사랑하사 그들을 불러 고쳐내시며 변화시키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 일의 표적이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보내신 것은 제사를 원하시거나 번제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어떤 예물을 받으시고 조공을 받으시는 것으로 기독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우리를 고쳐내기 위한 것입니다.


3. 보냄 받은 우리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의 오심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2-16) 시편 40편과 51편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기독교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사망과 흑암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쪽에서 빛을 비취시고, 찾아오셔서 그 빛을 보도록 우리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로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기를 기뻐하셨기에 빛으로 오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 자신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있었던 자이고, 깊은 흑암 가운데 앉아 있었던 자이며, 사망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희망과 생명과 구원의 빛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의 조건과 환경에 순응하며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예수님을 여자에게서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유한하며 제한된 조건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인 제약과 조건 속에 순응하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구원 받은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땅에 오신 것과 똑같은 이유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얘기들을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신분을 얻고 모든 복 속에 참여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자신의 신앙을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흑암에 비취는 빛이 되고 사망의 잠을 자는 자들 앞에 생명을 전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가로등이 끼리끼리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가로등이 같이 모여 있다면 하나쯤은 꺼져 있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로등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골고루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성도는 빛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끼리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편하게 모여서 산다면 아직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흑암과 사망의 자리 속에 빠져있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저들보다 사는 조건이 더 낫고 편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환경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과 구원에 대해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알게 된 이 구원과 진리와 생명이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들로 영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볼 때에 영적인 차원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과거가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절망 가운데 있던 존재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같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자리에 있음을 알기에 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을 전파하여 그 비참함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사명이 있음을 압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신자가 가는 풍성한 삶입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이 신령한 일이 우리들의 특권이요 복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아무런 이유도 없었습니다. 부족한 것이나 아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우리를 위해 오셨고 그리고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예수님 자신이 아닌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은 삶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곤란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복음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는 자가 신자입니다. 세상에서는 '살 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지만 신자의 섬김은 곤란한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섬김이며 봉사이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신자를 미쳤다고 말할지 모르나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4:11) 신자의 결론은 자기의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물질계에 속한 문제라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이나 힘에 의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것을 내 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받은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판단과 능력과 뜻으로 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사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경과 삶에서 영적인 신령한 도전을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끼치고 자극하여 진리와 생명과 영원을 생각나게 만드는 존재로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임을 알아 매일의 삶의 현장에서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 늘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은 번제보다 상한 심령의 제사를 기뻐하신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다윗 왕이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4. 다윗 왕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고민할 때 하나님이 내리신 처방은 무엇입니까?

5.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조건과 환경에 순응하며 오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신자 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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