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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유다

본문 / 유다서 1: 1- 2

 

 

1. 유다의 변화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 예수님을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부자 되게 해주는 예수님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병 고쳐주시고, 성공하게 해주는 예수님을 믿는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이 믿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천 명이면 천 명의 예수님이 나오고, 만 명이면 만 명의 예수님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유1:1)고 하여, 이 서신의 저자인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야고보도 우리가 아는 사도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육신적 동생 야고보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행15:12-19) 라고 하여 야고보는 초대교회 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여기서도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도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약1:1)고 하여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어려서부터 자기들과 똑 같은 형제로 알았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자신들은 그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많이 사용하다보니 익숙하여져서 별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죽고 사는 문제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이 한 마디의 말을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핍박도 받지 않을 것인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기에 순교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고백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과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인 그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부모 밑에서 함께 자란 사이이기에 그냥 자신들과 같은 사람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7:1-5)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에만 다니시니 그의 형제들이 왜 유대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막3:21)고 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친속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여겨서 붙들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믿기 힘든 사람들이 그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육신의 형제로만 여겼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는데 그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에도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도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4)고 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모인 무리 중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고 이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 제자들이 나가서 전한 내용이 사도행전 2장에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도 그동안 자신의 육신의 형으로만 알았던 예수를, 심지어 미쳤다고 여기기까지 한 예수를, 그래서 믿지 않았던 예수를, 이제 성령이 임하게 되니 갑자기 자신이 그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바울에게도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이단의 괴수라고 여긴 예수가 갑자기 주와 그리스도가 되고 자신은 그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만 외우면 나타나서 우리의 필요를 도와주는 그런 램프의 거인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인을 불러내는 주문을 기도로 바꾸고, 그 램프를 문지르는 손길을 정성으로 바꾸어, 예수님을 기도와 정성으로 불러내어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결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라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형제는 야고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호칭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아니요,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자기 영광이나 자기 자존심의 종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명예로운 호칭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과연 이런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돌이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여 달라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고 말하면서도 우리 마음이 멀어져 있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여야만 합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이란 사람이 언제나 주인공이요, 중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라는 것은 모두 사람 중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사람이 만든 사람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9장에 보면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사29:13)고 합니다. 입술로만 존경하고 마음이 떠난 이유는,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혜자의 지혜와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들어도 사람의 가르침만 가득하니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입술만의 고백이고, 마음은 여전히 자신이 주인 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도리어 너희들이 장로들의 유전은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은 범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로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중심이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우리는 과연 그의 종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의 주인은 언제나 내 자신입니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본문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라고 하는 이 말 한마디 앞에 회개할 것이 너무 많은 자들인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 전부가 회개꺼리인 것입니다. 여기서의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종의 자리에 있지 않고, 주인의 자리에 있는 것을 돌이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이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내용도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야만 자신이 종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가치를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부르심을 입은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은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3. 종의 가치

제일 먼저 우리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기에 우리가 주님을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복음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것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며, 이런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부르심의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어 있을 때에 그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기에 신령한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신령한 복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자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상속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러한 부르심과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8-9)고 하여 사랑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사실 하나입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고맙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는 이 편지를 쓰면서 왜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1:3)라고 하여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지 하는 것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있었는데 마침 이단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함께 이단에 대한 권면도 담아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권면은 다음 주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한마디로 하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유다서를 받는 성도들은 지금 어려움에 처하여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는다는 말씀 앞에 세상의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사의 마지막 말은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라고 합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 긍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은 평강을 누립니다.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염려들로 인하여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우리를 누가 감히 송사하며, 환난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죽음조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러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우리에게도 더욱 많아져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기쁨임을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잘나고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넉넉하게 이기게 하실 것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아름답게 선포하며 살아가는 예원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오늘날과 초대 교회에가 다르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들이 형으로만 여겼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 근거는 무엇입니까?

3. 성경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오늘날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먼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라는 말 앞에 우리가 회개하여야 할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세상이 알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은 무엇입니까?

7. 우리가 세상의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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