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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의 뜻

본문 /  유다서 1: 3- 4


1. 새 하늘과 새 땅

2012년도 이제 한 달만 있으면 다 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2013년을 새해라 하여 새해맞이를 한다고들 난리를 칠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가 새해가 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2012년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에서 땡 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면서 새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들도 교회에 모여 찬양을 하다가 2013년이 되는 순간 전교인이 박수를 치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고 하여 송구영신예배를 함으로써 새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송구영신(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이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도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니며, 정동진에서 새 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2012년 마지막 날에 떠오른 태양이나, 2013년 첫날에 떠오른 태양이나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시와 연한을 나눠 놓으신 것은, 결국 어리석은 인간들로 하여금 지나간 죄에 묶여 사는 자들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은혜로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해는 우리가 이해하는 새해라는 의미보다는 새하늘과 새땅에 의미를 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새해라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하지만 성경은 종말론적인 새하늘과 새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하늘과 땅을 두고 성경에서 새하늘과 새땅을 말씀하는 것은, 결국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악이 관영하게 된 하늘과 땅이라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말씀처럼 예수님이 주인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이 주인인양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45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45:18)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놀랍게도 사람들도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들은 스스로 신이 되고 하나님처럼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바냐서 2장에 보면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습2:15)고 합니다. 구스만 이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이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2-4)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시고, 그 새하늘과 새땅에는 새사람만 들어가게 하시는데, 그 새사람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직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모든 구원 얻는 자들은 은혜로 얻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구원에 대하여 지난주에 인사말에서 보았듯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입니다.


2. 복음에 대한 오해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1:3-4)고 합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는데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것인데, 이 구원의 도는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몇 년을 노력해야 한다는 그런 조건이 아니라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도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버리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방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공통적인 구원이며,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단번에 얻은 구원이기에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애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구원도 단번에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도 보면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롬6:10)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7장에도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7:27)고 하여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또한 같은 히브리서 10장에도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일어난 엄청난 일이 결과로 우리 모두가 죄 사함과 거룩함과 영생을 다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려다가 이제는 이 놀라운 소식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유다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한번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살더라도 구원은 따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 얻은 구원은 죄 지었다고 해서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았고, 인간들의 육체는 어차피 썩어질 것이니 육체를 가지고 온갖 죄를 지어도 구원 받은 영혼에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그래서 그 얻은 구원이 취소 될 수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가지고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는 말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 은혜를 주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들로 등장하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서도 뻔뻔스럽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든지 그렇게 이용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교회역사에서 계속되어 지고 있는 싸움인 것입니다. 오직 믿음만이라고 하니 방종하며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종하게 하지 않도록 율법이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 생활의 규범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중에서도 제사법 같은 것들은 사라졌지만 도덕법은 유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을 묶어두지 않으면 사람들은 방종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갈라디아교회 같은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갈2:3-5) 여기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주장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로만은 부족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두 가지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한 쪽은 모든 것이 은혜이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자는 것이고, 이와 반대편에는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율법의 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둘 다 무엇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까?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이기에 내 육체의 욕망대로 살겠다는 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율법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 등장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이 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래도 복음만으로 부족한 것 같으니 율법적인 행함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까? 아마 이 둘 사이에 왔다 갔다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니 내가 좀 편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나의 모습을 보니 너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율법적인 열심을 내려고 하니 그것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갈등이라도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3. 보존과 멸망

그런데 이런 논쟁을 살펴보면 그 안에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의 구원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만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율법적인 행위를 강조하거나 간에 결국의 중심은 내가 구원받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파 같은 이단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파들의 주장이 유다서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에 구원을 얻었는데 왜 또다시 속죄에 대한 찬송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왜 또다시 죄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단번에 구원을 얻었기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중심내용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유다서에 나온 그런 이단들처럼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고서는 자기 육체의 정욕대로 살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그 목적을 찾아보아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하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골로새서 1장의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하는 말씀처럼 천지만물의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따라 구원 얻은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구원이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은혜가 임한 자는 그 은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그 은혜 받은 자를 인도하며 이끌어 가며 그 은혜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4:7-12)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히 은혜를 받았다는 자들이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부분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옛적부터 심판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받기로 작정된 자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17:11-12)고 하여 보전하는 자가 있고, 멸망의 자식이 따로 있다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인도함과 지배함과 통치함을 따라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어질 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도 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초대교회에 있었던 문제들처럼 우리도 그 은혜를 우리 자신의 육체의 기회로 삼아 이미 구원을 얻었으니 그 다음은 내 편한 대로 사는 것은 아닌지 또는 은혜의 구원이 부족하게 느껴져 자신의 구원의 확실함을 얻기 위해 뭔가 부지런히 해야만 마음이 편한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부터는 그 은혜에 지배와 통치를 받으며, 인도함을 받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임을 알아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생각하는 새해가 없는 이유와 그럼에도 연한일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늘과 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하여 유다는 어떻게 얻은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4. 구원에 대하여 잘 못 이해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5. 구원파를 비롯하여 이런 구원에 대한 논쟁이 잘못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참된 구원과 참 은혜를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합니까?

7. 구원을 은혜로 받았음에도 그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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