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표적과 기사
본문 / 행 5:12-16
1. 기사와 표적의 의미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로 인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세 번째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떡을 떼며 교제함과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고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여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는 일이 나타납니다. 또한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으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자기의 재물을 조금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병자들이 치유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표적과 기사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병자가 낫는 것만을 표적과 기사로 봅니다. 그러나 저는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더 큰 표적과 기사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표적과 기사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두 사람이라도 하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심지어 부부라도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서로 어느 정도씩 양보하니 살아가는 것이지 정말 마음이 찰떡같이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씩은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도 합니다.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두 사람은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 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않은 이러한 일, 그것도 율법이나 억지가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된다는 것이 결국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이기에 참으로 놀라운 표적과 기사인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이 참된 표적이며 기사인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병자의 치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5절부터 보면 놀라운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바라는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허다한 병자들이 나아와 고침을 받고 귀신에게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면 생명의 주가 되셨음을 나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막5:53-56)고 합니다. 지금 사도들의 치유가 예수님의 치유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4-18)고 하십니다. 이러한 표적들이 사도들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새 방언이 일어났고, 병자가 나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같은 경우에 뱀에게 물렸어도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에게 국한 되는가 아니면 오늘날도 계속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복음은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지만 복음과 함께 사도들의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계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사도적 권위로 제한하여 봅니다. 사도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로 인하여 성경이 완성되고서는 복음이 계속하여 땅 끝까지 증거 되지만 표적과 기사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까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이 물러가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2. 기사와 표적의 허와 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면 예수를 믿는 자가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지금 모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한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어떤 표적과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것 때문에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만약 지금도 사도적 권세가 나온다면 성경은 계속하여 추가되어야 하고, 교회 역사에서 기적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추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경의 완결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 이후에는 어떠한 사도적 표적과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를 ‘속사도’시대라 합니다. 그때 활동하던 자들을 교부라고 하는데 로마의 클레멘트가 주후 95년에 기록한 글을 보면 “사도들은 우리를 위한 복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다”고 합니다. 주후 117년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나는 죄수이기 때문에 내가 사도인 것처럼 너희에게 쓸 수가 없다. 나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너희에게 명령을 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도들이시다. 나는 다만 정죄 받은 죄인일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들과 자기들의 구분을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도들과 같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교부들의 기록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적들이 서서히 나타나는가 하면 교회가 처음 50년(100-150년)에는 거의 아무런 이적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년(150-200년) 동안에는 조금 그리고 대수롭지 않는 이적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기(3세기) 동안에는 상당히 풍성한 이적들이 나타나고 4세기에는 더 많이 정밀하게 나타나고, 5세기 이후로는 계속하여 증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모든 종류의 미신들과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인 사건이라면 어떤 한 것이라도 쉽게 믿어버리는 세계로 증거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 하면서 기적이 교회사에 더욱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가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형식상 기독교로 개종은 하였어도 그들이 평소에 행하던 종교적인 주술들도 그대로 기독교로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세에는 온갖 기적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역사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이적역사는 교회에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교회로 흘러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점점 더 심화되어지자 교회가 이제는 이방의 분위기로 젖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그러한 것들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방의 세력들이 자신이 가진 내용을 가지고 교회를 정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신사도 운동’이라고 하여 지금도 사도들과 같은 계시적 은사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은사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에도 교회나 기도원 등에서 기도하여 불치병이 낫는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넓게 보아서 계시적 은사는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하여 특별한 체험을 하게 하실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찰에서도 기도하여 병 고침 받고, 중국이나 인도에서도 신비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질병은 의술로 고치지 못하였는데 걸어 다니다가 나은 경우도 있고, 자연 치유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와서 병을 고쳤다는 것만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고 다른 종교 또는 전혀 종교가 아닌 방법으로 치료가 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이적을 보고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씀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증거 하는 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냥 내 병이나 낫고, 부자 되고 하는 식이 결코 아닙니다. 더구나 사단도 얼마든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12)고 합니다. 사단도 얼마든지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적과 기적을 쫓아다니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차원에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적을 쫓아가는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도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24:2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표적과 이적을 인하여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출애굽 전에 또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많이 기적을 목도 하였음에도 그들은 믿음이 없어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선교의 현장에서는 이러한 기적들이 지금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을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들을 맛 본 사람들도 잠깐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때뿐이지 시간이 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렇게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기사와 표적으론 한 순간은 어떨지 모르나 그것이 인간들에게 믿음을 산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진정한 기사와 표적
그러면 참된 표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표적과 기사로 구원을 이루어 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과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인자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 3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란 사람들이 원하는 표적과 기적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어떠한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라 가장 실패한 모습이요, 힘없는 모습이요, 사람들이 싫다고 고개를 흔들며 침을 뱉고 저주하며 돌아서는 십자가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고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온 것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왔지 표적을 보고서 따라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이란 십자가를 증거 하는 표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따라온 자들을 향하여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떡을 얻어먹어도 죽습니다. 병이 고침 받아도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으면 죽어도 삽니다. 영생의 양식과 영생의 음료수는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표적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24) 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표적도 아니고 기적도 아닙니다. 실패이며 죽음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십자가의 미련한 전도와 십자가의 미련한 선포를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서 고개를 흔들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표적과 기사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다면 이보다 더 큰 표적과 기사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 박고 있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성공이나 실패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범사에 넉넉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이웃과 비교해 보면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변변찮은데도 세상에 주눅 들지 아니하고 자기의 소유에 집착하지 아니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사람들이 모든 조건을 보아도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데 나는 왜 이렇게 괴롭고 답답하게 살고 있는가 하면서 우리가 가진 소망에 대하여 물어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성도를 칭찬할 것입니다. 당신은 정말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맛보며 살고 있는 것 같으니 나에게도 좀 알려 달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또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런데 오히려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 믿어서 천국까지 확보해 놓고서도 하나님의 힘까지 빌려가면서 이 세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당신들과 함께 천국 가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참된 표적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기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선포하며 살아가는 그런 표적이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은혜와 이런 삶이 예원의 모든 가족들 가운데 항상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말씀에서는 무엇을 기사와 표적이라고 말하며 또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사도들을 통하여 병 고침과 귀신 쫓는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이것을 사도들에게 있는 제한적인 권위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교회사 가운데 드러난 기독교의 기사와 표적의 허와 실은 무엇입니까?
4. 병 고침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우리가 생각하는 기사와 표적에 대하여 우리가 항상 경계하여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6. 눈에 보이는 기적을 보고 따르는 자와 주님이 주신 기적을 보고 따르는 자는 어떻게 다릅니까?
7.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