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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본문 / 2: 8-15

 

1. 계명과 초등학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4년마다 인류의 화합을 위하여 올림픽을 합니다. 그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그 대가로 금 은 동 메달이 수여됩니다. 그리고 그 메달을 받은 사람은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례를 합니다. 지금까지의 고생과 수고에 대한 보상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승리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부러워할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은 희한한 승리를 이야기 합니다. 누가 봐도 승리가 아닌 실패와 저주인 십자가를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저주 받아 죽은 것이기에 누구나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도 십자가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십자가가 승리가 된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2:8)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가지고 노략질 하는 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임이란 사람의 전통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은 것이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면 흔히 헬라 철학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철학이라는 말자체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자들이 어떻게 속임수로 노략하여 나오는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에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를 멀리하게 만들고, 더 이상 십자가에만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신비한 체험의 세계라든지, 영적인 비밀한 지식을 말하는 자들이 들어와서는 골로새 교인들을 사로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철학이며, 사람의 전통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이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다 있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마가복음 7장에 잘 나와 있는데 그 중에 4절까지만 보면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7:1-4) 라고 합니다. 여기 괄호부분이 유대인들의 전통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니 예수님께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고 비난하며 질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이사야 선지자가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해 놓았다고 하시면서 그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7:6-7)고 하십니다. 사람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가르침과 전통이란 세상의 초등학문의 수준이며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있고, 행할 수가 있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의 속에서 무엇이 나오는 것입니까? 21절부터 보면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고 합니다. 사람의 겉은 씻을 수가 있지만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결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의 기초적인 원리라는 것이 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생각들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가 다 선악체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척하는 것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며, 사람의 전통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든 가르침이든 간에 다 이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떡이는 내용들은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2. 증거 내용

그러면 바울사도가 증거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2:9)라고 합니다. 여기서 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성이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능력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에 사람과 화해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충만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2:10)고 합니다. 장차 충만해 질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해 졌다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며 사는 것뿐입니다.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시는데, 그 정사와 권세란 하늘과 땅의 모든 통치권을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다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충만함이 성도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기에 그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충만하여진 것이고 또 그 분 안에 거하는 모든 삶은 충만함을 누리며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골로새 교회에 이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세상의 철학이나 유전이나 초등학문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에게 흔들리고 있기에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문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음과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다른 것에 기웃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증거 되는 수많은 내용들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만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 이야기도 하고, 십자가 이야기도 하는데 그것은 시작할 때뿐이고 결국은 그것을 벗어나서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다들 실감하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결코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이 다 끊어질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받아내는 비결을 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전통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이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베풀어진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2:11)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400년 전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할례란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할례를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는 누구나 할 수가 있지만 마음의 할례는 사람들의 노력과 힘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죄악을 끊어내고 잘라낼 수 있는 방법이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런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까? 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2)고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세례란, 우리가 물로 받는 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인데 이것을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성도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세례를 다른 말로 하면 성령과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죽은 적도 없고, 부활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났다는 것이며,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 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2:13)라고 합니다. 12절에서는 함께 장사한바 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신성의 충만함은 없습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참여 시키셔서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며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와 사랑 가운데 사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3. 정죄함이 없음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김없이 율법이 찾아와 송사를 합니다. 너는 죄인이라서 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변명을 합니다. 내가 좀 더 노력하여 법을 더 충실히 지켜서 사망을 이겨 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대율법주의의 모습입니다. 그런 반면에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은 양심의 법이 이런 행위를 합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2:14-15)고 합니다. 우리가 다 이런 모습에 붙들려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송사하고 변호하고 하는 일이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양심의 송사를 받으면 사람들은 양심대로 착하게 살아서 천국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도 이방인도 율법이나 양심이 우리를 늘 송사하면서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의 조문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의문의 증서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빚을 진 사람의 채무증서와 같은 것입니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빚쟁이가 얼마나 끈질기게 찾아오는지 직접 경험 해 보지 않았어도 잘 아실 것입니다. 빚쟁이들이 빚을 받아내기 위해 집안에까지 들어와서 가족들을 위협하며 아예 방에 들어 눕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권능이 바로 율법입니다. 죽어버리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어버리면 다시 살려내어서라도 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2:14)라고 하는데, 이것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2:14/표준새번역)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죄의 빚은 바로 사망입니다. 그 사망의 권능인 빚 문서를 지워버리고 없애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완벽하게 해결된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5)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2:15/공동번역)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을 하면 그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적군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줄에 묶어서 승리의 행진 대열 끝에 마치 승리의 전리품처럼 끌고 오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고 살았던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들이 모다 다 그렇게 무장해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조문이든 양심의 법이든 마귀의 송사든 간에 전부다 무장해제 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묶어 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자유를 얻게 하셨고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그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법에 매여 할 때는 어떤 일도 힘이 들었지만, 사랑에 매여 하는 자들에게는 힘이 드는 게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하는 모든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렇게 순종하는 삶이 힘이 든다면 우리를 향한 우리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주의 사랑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약한 우리의 시작이 그 미약함으로가 아닌 그 나중은 창대함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이제는 더 이상 주 안에서는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승리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모든 충만함과 교제와 자유가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며, 존재이며, 복음 안에서의 현실인 것입니다. 내 삶과 모습은 여전히 어리석게 살아가며 또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하게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우리를 정죄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 주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그 문제를 다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사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이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어떤 풍파 가운데서도 요동치 아니하고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매일의 삶이 주님이 허락한 사랑과 그 자유로 감사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에서 철학과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은 어떻게 다르며, 사람의 가르침으로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3. 오늘 본문의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은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까?

5. 유대인들의 할례와 바울이 말하는 할례는 어떻게 다르며, 그 할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았다는 우리의 체험의 증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문의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예수님의 십자가 전과 십자가 후의 모습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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