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0,535
오늘 : 234
어제 : 287

페이지뷰

전체 : 78,736,700
오늘 : 1,133
어제 : 1,640
조회 수 93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제목 /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 / 요17:13

 

성경 속의 주님의 생애를 보면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슬퍼하시고 우시는 장면들은 있어도 기뻐하시며 웃으셨다는 표현은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의 평안과 기쁨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 약속을 받은 신자들 가운데 기쁨 속에 있거나 승리하고 있거나 평화로운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과 복 그리고 평안이라는 것을 너무 세상적인 차원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본문에 있는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내용으로 삼아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살펴봄으로 우리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익과 특권들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합니다.

 

1. 기쁨

먼저 요한복음 15장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9-11) 여기에도 기쁨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케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15장이나 오늘 본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7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0-11)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주님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과 저희도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시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기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15장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거한다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이며 또한 하나 된다는 것은 신자의 기쁨의 유일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에게 완성되기 위해 오셨는데 그것을 십자가 대속의 사역으로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이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 같이 저희도 우리와 한가지로 하나 되게 하는 자리에 초대를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가 되는 초대의 결과 자연히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도 전달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바로 이런 식으로 기쁨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가지셨던 기쁨이며, 그 기쁨은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그 일에 동참하고 그 마음과 뜻과 계획과 성품에 동참한 자가 당연히 가지는 그런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쁨과는 차원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기쁨이란 나의 욕심과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신자의 참 기쁨은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만 다 해놓고 기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일은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선한 것이기에 기쁨이라는 것이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같은 전혀 새로운 기쁨을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확인시켜 주고 싶어 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하십니다.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기쁨이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당연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가서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이후에 동네에 들어갔다가 먹을 음식을 마련해 온 제자들이 음식을 내 놓자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4:32)고 하십니다. 여기서는 만족과 기쁨을 양식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령한 기쁨이 삶의 에너지요, 놀라운 동력원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것으로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신자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이러한 신령한 양식으로 힘을 얻어서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는 존재이어야만 합니다.

 

2. 믿음의 격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 다루는 성경이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의 주제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입니다. 하박국서는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살아 계심에도 왜 세상이 이대로 형편없이 돌아가는 것을 방치하고 계시며 왜 악당들이 설치며, 의로운 자들이 악인들에게 고난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냐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해 시원한 답이 없다 보니 많은 신자들이 주일은 신자가 되고, 나가 세상에 살 때에는 의인으로 살아서는 도무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악인과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하남의 만연된 풍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의인으로 살 것을 요구하면 언제나 너무도 떳떳하게 ‘그렇게 살아서는 입에 풀칠도 못한다’고 하는 겁 없는 대답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결론적인 대답이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과 이 세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알며 마지막 날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며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알며 하나님이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과 환경과 조건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대로 타협할 것이냐, 약속을 따라 믿음을 지켜 싸울 것이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 준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 주는 것으로 약속된 적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실 때 그런 방법을 쓰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 해결이 결코 목적은 아닙니다. 만약에 무슨 문제든지 다 해결되는 것이 기독교라면 신앙의 최고의 경지인 순교는 설 자리가 없으며 그리고 더 깊은 믿음과 높은 신앙의 경지가 과연 필요하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신앙의 깊은 경지보다 주시옵소서라고 하였을 때 주는 게 좋습니다. 전부가 유치원생이 되기를 자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처에 십자가 아래 유치원만 만들었습니다. 다시 말해 신앙적으로 유치원의 때를 벗고서 깊은 자리에 나아오는 것을 거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주님이 가지셨던 그 평강과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놀랍게도 삼십년을 믿었는데도 여전히 유치한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신앙은 계속적인 수준향상으로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장성한 신앙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맛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모든 자취가 우리를 위함이었듯이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를 기쁘게 만듭니다. 이제는 돌에 맞아도 기쁘고 죽어도 기쁜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그를 절망과 좌절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도 기도하셨듯이 그의 평안과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3. 마음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주님께서 그의 자리에 우리를 대치시키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8절에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즉 주님이 받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3절에는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줍니다.’라고 말하며, 16절에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18절에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냅니다.’ 19절에는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또 22절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26절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또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입니다’ 이렇게 이 모든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들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쁨인 것입니다. 여기 말하는 기쁨은 우리가 요구하는 세상 적이고 물질적인 내용을 들어 줌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서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와 신분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기쁨이요 약속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증언이며 또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던 것과 같이 신자의 존재와 삶도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같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존재가치입니다. 신자는 세상의 환경을 바꾸려하기보다 세상에서 악하게 살수 밖에 없었던 자들이 ‘나’를 봄으로 하나님의 빛을 보며 생명을 보며 그 향기를 맡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이제 알게 된 하나님께 기도하여 내 환경을 다 좋게 만들어서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거기엔 거룩한 기쁨과 행복은 없고 오직 나태와 안일과 자기 욕심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신자들이 가진 직분에 대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이렇게 우리 신자들은 화목케 하는 직책과 말씀을 받았습니다. 팔복 중에서도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설정해 놓고서 상징으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란 바로 이렇게 화목케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삶이 유일한 의미와 보람이 이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1장에는 좀 더 실제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성경은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의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져 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무거운 짐을 잘 지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같은 무게의 짐도 어떻게 꾸리며 지냐에 따라 쉽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그런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짐을 지고 내게 오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짐이 얼마나 어려우시면 잡히시기 전에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하셨고 또한 얼마나 심각하게 기도하셨으면 예수님의 이마에 흐르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와 같았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이 짐 자체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이란, 짐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지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억울하면 단 돈 몇 푼으로도 사람을 죽입니다. 별것 아닌데 억울하면 큰 싸움이 되기도 하며, 우리는 억울하기 때문에 짐이 언제나 무거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 짐이 안 무겁다’고 대답하십니다. 그 일이 억울하지 않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생각하면 억울한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뻐하시는 일을 하러 왔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이며, 이것 자체가 그의 기쁨이기도 하신 분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자리에 우리들을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런 신분의 사람들이며, 신자의 모든 삶의 가치가 바로 이런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마음에 이 기쁨과 평안을 놓쳤거든 우리는 그것을 다시 확인해 보아야만 합니다. 신자로서 나의 신앙이 어디 있으며, 무엇이 내 삶의 부분이고 핵심이며 원리인가 하는 사실들을 늘 확인해 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드디어 발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결론적으로 신자의 삶이란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 여기서 말씀하는 기쁨은 관용이 있는 기쁨입니다. 관용이란, 굴복하고 굴욕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에 기쁨이 붙어 있느냐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빛과 진리와 생명을 가졌고 그리고 그 생명을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생명과 진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며 빼앗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협박하고 막고 방해한다고 해도 떨지 말고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관용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로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이런 하나님의 평가에 맡기십시오. 십자가가 실패의 길이 아니고, 돌에 맞아 죽어도 망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세상적인 것을 목표와 싸움에다 시간을 허비하시지 말고 과연 나는 참 신자로서의 삶의 방법과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정리하셔서 언제나 주님보시기에 아름다운 존재와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기쁨은 어떤 종류의 기쁨입니까?

2.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오랜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유치원생과 같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4. 우리 신자들의 이 땅에서의 존재가치는 무엇입니까?

5. 무거운 짐을 지고도 주님께 배우면 무겁지 않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6.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33 3월 18일 2부 / 십자가 속에 감추어 두신 복음의 광채 170 관리자 2012.03.18 27917
732 2월 16일 / 사도행전7. (행2:1-4) 오순절 날에 임하신 성령님 649 관리자 2014.02.26 22643
731 9월 1일 2부 / 야고보서17.(약4:5-10)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는 하나님 1263 관리자 2013.09.01 16050
730 7월 29일 1부 / 미리 준비하는 우리의 신앙 542 관리자 2012.07.29 12835
729 3월 2일 / 사도행전9. (행2:14-21)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641 관리자 2014.03.01 11681
728 9월 29일 / 야고보서21.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283 관리자 2013.10.06 10359
727 3월 30일 / 사도행전13. (행3:1-10)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1031 관리자 2014.03.29 9855
726 3월 16일 / 사도행전11. (행2:33-36)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511 관리자 2014.03.15 9529
» 3월 28일 1부 /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 553 관리자 2010.03.27 9382
724 12월 1일 / 디도서5. (딛2:6-10)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880 관리자 2013.12.01 9164
723 10월 27일 1부 / 디도서1.(딛1:1-4) 예수님의 사도 그리고 그의 사역과 임무 278 관리자 2013.10.27 8809
722 3월 9일 / 사도행전10. (행2:22-32)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539 관리자 2014.03.08 8527
721 9월 18일 2부 /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노라 993 관리자 2011.09.17 8490
720 2월 2일 / 사도행전5. (행1:12-14)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니라 730 관리자 2014.02.26 8290
719 3월 23일 / 사도행전12. (행2:42-47) 사도들로 말미암은 기사와 표적 513 관리자 2014.03.22 6855
718 11월 24일 / 디도서4. (딛2:1-5)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라 781 관리자 2013.11.23 6061
717 1월 19일 / 사도행전4. (행1:9-11)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증인의 삶 116 관리자 2014.02.26 5706
716 6월 12일 / 결혼과 이혼 그리고 하나님의 뜻 443 관리자 2011.06.12 4725
715 12월 8일 2부 /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시는 하나님 161 관리자 2013.12.08 4653
714 1월 27일 1부 /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고 96 관리자 2013.04.10 460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