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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그 이름을 위하여 받은 능욕을 기뻐하는 신앙

본문 / 5:33-42

 

 

1. 본능

예수님의 사도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자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의 예수 믿으라고 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이 크게 노하여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은, 자기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또 죽인 예수님이 사도들의 선포처럼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면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결국은 그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죄 없는 자를 죽인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사도들의 입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장악하여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유대인의 회를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8-11)고 합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끊임없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기는 하되, 십자가는 증거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무언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그런 복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할 설교시간에 수많은 세상의 성공한 자들의 성공 사례가 간증이라는 명목아래 소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성공이야기까지도 도입하면서 성공하는 방법 강의를 하는 곳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그러한 것에 세뇌가 되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하면서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마치 다단계 판매하는 사람들이 회원을 모집하여 거기서 돈 좀 벌었다고 하는 사람을 강사로 세워 집중 강의를 통해 다단계 회원들을 세뇌시키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세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공부하는 대학생들까지도 자기들의 등록금을 투자하면서 나도 성공해보겠다고 나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화는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에 앉아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가치는 복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복만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해탈하는 것, 이러한 것을 복이라고 여기며 고행을 통해서라도 이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을 복이라 여기지 않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우리는 그러한 복이 아니라 천국 갈려고 합니다. 영생을 받으려고 합니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욕심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벌을 받고 지옥에 가야 마땅하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구원받아 천국 가고자 하는 것 역시 인간이 가진 종교적 본능인 것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종교에서는 다른 말로 할 뿐인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여 4단계 회개에 대하여 나온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4단계 회개를 하여야만 조상의 죄와 자신의 죄로부터 사함을 받고 모든 복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신문에 낸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이 복 받고 영생 얻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받고자 하는 열망까지도 정죄당하는 곳이 십자가의 현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십자가 이전의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고생은 나중에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비록 고생이더라도 나중의 성공을 위해 따라 다닌 것이며,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도망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주를 위해 죽기 위하여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이 살기 위하여 따라 나섰기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죽기위하여 주님을 따라 나서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있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고 그것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이 거부할 수 없는 본능인 까닭은 것입니다.

 

 

2. 종교생활

이러한 것을 욕망으로 아는 사람들은 이러한 욕망에서 해탈하고자 온갖 고행을 다 하면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교회들이 타락을 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철저한 금욕주의자 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청빈과 순결 그리고 금욕적인 삶을 주장하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 프란시스코 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청빈과 순결 그리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나서게 되고 하나의 수도원단체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주제로 만든 영화를 보면 그가 엄청난 고행과 수도를 통해 마침내 성흔을 받게 되는 내용이 영화에 나옵니다. 성흔이란 예수님과 같은 상처 난 흔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톨릭적 기적입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6:17)고 하여 바울 사도도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흔적이 어떤 흔적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코는 양손과 양발 그리고 허리 이렇게 다섯 곳에 흔적이 나타나자 그가 아주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에게 나타난 이러한 흔적이 그의 수도 생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면 보통사람들은 정말 힘든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정도로 수행할 수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수도하는 곳이라면 절이든 교회든 어디든지 찾아가 직접 체험한 기자가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수도는 인간 스스로 인간의 마음을 비우고 수련할 수 있게 한다고 합니다. 수양하는 방법은 다 달라도 공통점은 욕심을 버리게 하는 것이며, 결국은 인간이 스스로 해탈의 경지와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종교생활의 경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이런 수행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자원해서 도를 닦기 위하여 따라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미리 택하신 것이고 또 그 택하심을 따라 부르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보내시기까지는 아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어 사도행전의 모습처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주님께서 대신 고난 받으심으로 주어지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을 회개하고, 자기 의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당시의 지도자들이 이들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선포하는 복음이 너무나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이 열어 사도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회원들 가운데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사도들을 죽이고자 하는 것에 대해 막아서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이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만약 저들의 주장이 진리라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전에도 드다나 유다 같은 사람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추종하였으나 결국 흩어져 버린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저들도 사람들에게 난 것이라면 곧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의 이 말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면 사람의 일이냐를 판단하는 방법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회에서는 사도들은 채찍질 하고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줍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그 채찍을 맞고 나오면서 무어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41절부터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1)고 합니다. 채찍 맞고 협박받아 나오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거나 또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조금만 힘이 드는 것에 대해 얼마나 싫어하는 존재인지 모릅니다. 신앙적으로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 기뻐하는 자들이 아니라 속상해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어떻게 이런 고난을 받음에도 기뻐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러한 고난을 사도들이 기뻐하고 있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 고난을 기뻐함

사도들이 고난을 기뻐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15:18-20)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싫어하는 까닭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소속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인간 모두가 다 한 통속이었습니다. 다 마귀의 권세아래서 세상의 풍속을 따라 자기 욕심에 끌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가면서 때론 미워하고 다투더라도 화해하면서 우리는 그래도 같은 인류라고 하면서 그래서 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며 또는 아직은 악인보다는 의로운 사람이 많다고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 싫어하고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너무 이기적이고 잘못해서 오는 욕을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체면과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며 살아가지만,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가능성을 모두 다 부정합니다. 물론 이것은 다 하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도 하늘의 생명을 만들거나 획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도생활을 하며, 청빈하고, 금욕적이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생명을 산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차원에서 인간은 그 가능성이 전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인간은 자기는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를 천국 보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회개할 뿐인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처분하시옵소서! 그런데 천국으로 가게 하신다면 거저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는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사람이 생기지 못하도록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면 나도 예수님께 소속이 되었구나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6:22-23)고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따돌리고, 욕을 먹고, 악하다고 버릴 때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생각으로 과연 세상에서 이런 복을 받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정말 피하고 싶은 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우리에게 주실까봐 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 제발 이런 복을 제게 주지 마옵소서. 성령의 충만도 주지 마옵소서.’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복을 혹 주시면 내 남편이 또는 내 아내가 잘 살고 있는 집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고 하면 곤란하여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복을 거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고 그 복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사도들에게 임하니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우리의 신앙의 실체를 주 앞에서 점검하시고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함께 찾아 나누어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6) 아멘!!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성도에게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것이며 또 성도에게 믿음의 시련은 연단을 낳고 소망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고난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참되시니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주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서 나를 부인하고 주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범사가 하나님께 기쁨과 존귀와 영광을 돌려 드리는 아름다운 날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사도들을 죽이려 할 정도로 사도들의 복음 전파를 싫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오늘날 사탄이 사람들 가운데서 바른 신앙의 길을 방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주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오늘날 인간들이 추구하는 종교 생활의 경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주의 사도들이 세상에서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핍박을 기뻐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인간을 바라보는 세상에서의 시각과 성경에서의 시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이 조명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신앙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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