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방문자 수

방문자수

전체 : 4,212,913
오늘 : 129
어제 : 313

페이지뷰

전체 : 78,750,636
오늘 : 534
어제 : 1,570

제목 / 지혜와 성령의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자들

본문 / 6: 8-15

 

 

1. 돌 맞는 천사 얼굴

오늘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 집사로 세움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를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알 수 없겠지만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돌에 맞아 눈이 터지고 코가 깨지고 머리가 터지면서 돌에 짓이겨져 죽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얼마나 미웠으면 사람들이 이렇게 죽였겠습니까?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죄가 몇가지 있습니다. 우상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자(20:2), 여호와를 저주하는 자(24:10-23),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자(13:10), 부모를 거역하는 자(21:21), 간음하는 자(21:21,24)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잡혀 온 자에 대하여도 돌로 쳐 죽였습니다(15:36). 그렇다면 과연 오늘 본문의 스데반 집사가 이렇게 돌에 맞아 죽을 만한 죄를 범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스데반 집사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6: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와 성령으로 복음을 증거 하니 유대인들이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의 증거를 듣고서 회개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키고 공회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세워서 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한다고 하며 고발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자기들에게 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이러한 고발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걸었던 것과 같은 죄목입니다. 성전을 헐고 율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발에 이르면 곧 죽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하나님을 모독하였기에 사형에 해당된다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이제 그 예수님을 전하는 스데반도 동일한 죄목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도대체 스데반에게 무엇이 있기에 죽음 앞에서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나는 것이겠습니까? 전도서 8장에 보면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8:1)고 합니다. 전도서에서의 지혜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은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평소에 사납게 생긴 사람이라도 아름답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그 얼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우리의 얼굴에 진리의 광채가 나오는가? 아니면 세상의 탐욕이 가득하여 보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오히려 사나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죽음 앞에서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난 사람이 목사가 아니라 집사인 것입니다. 우리도 집사라는 직분을 받습니다. 그러면 스데반 집사 정도는 당연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슨 스데반 집사 정도씩이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스데반이 받은 주님의 은혜와 성령은 고급하고, 우리가 받은 주님의 은혜와 성령은 저급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스데반 집사보다 격이 낮은 집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아직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데도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천사같이 빛나는 얼굴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가장 복된 모습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십자가가 증거 되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보다 더 약게, 더 악착같이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동차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처럼 점점 가속이 붙어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남보다 뒤쳐져서는 안 되니 자신을 매일매일 다그치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과 자기의 자녀들까지 들들 볶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향하여 달려가는지 그 방향성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저 남이 달리니 자기들도 달리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도움까지 받고자 하여 매일 모여 기도하고, 교회 봉사에도 열심을 내니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모습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얼굴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스데반 집사를 본받자고 하면 돌을 맞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2. 스데반을 죽이는 곳

이제 스데반을 죽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인 자들은 이방인들이거나 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뜨거운 열의가 있는 사람들인지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에서 살다가 성전 가까이 살기 위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열심이 대단한지 유대인 성인 열 명이면 회당을 하나씩 지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물론 스데반 집사도 이러한 곳에서 복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전과 율법에 열심이던 이 사람들이 스데반의 말을 들어보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성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심이 자기 의를 세우는 잘못된 열심이라고 지적하자 그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노한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설교는 다음에 보겠습니다만 스데반이 죽은 이유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7:7)고 하십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행사를 일부는 악하지만 일부는 착하다고 하셨다면 그래서 이방인들의 행사는 악하지만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유대인들은 착하다고 하셨다면 죽으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부 다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행사란 예수님을 보기를 고대하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네 나이가 오십도 못되었는데 어찌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말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한 유대인들을 보고서 그러므로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겠습니까? 자기들만은 선택을 받았고, 자기들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권능이 충만하였던 스데반 집사도 그렇게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겠습니까?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율법을 생명처럼 지킨다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스데반을 죽였다는 것은 죄가 어느 정도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보낸바 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여 온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라-그들은 아예 모르는 것입니다-유대인들인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죄로 가득한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동물원을 새로 짓고, 동물들을 옮겨놓는 과정에 대하여 쓴 글을 보았습니다. 물에 사는 동물들을 풀어 놓기 전에 먼저 그 동물들이 살 물에 미꾸라지를 풀어 놓는 것입니다. 시멘트로 만든 것이기에 시멘트 독을 제거하기 위해 물로 몇 번을 씻어 내었는데도 시멘트 독이 있다면 미꾸라지가 살지 못하는 것이고, 미꾸라지가 살아 있다면 독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기에 먼저 미꾸라지를 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 세상이 독과 악이 가득하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독과 악이 가득한 그 세상이 스데반 집사도 죽이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거기서 산다는 것 자체가 도리어 이상한 것입니다. 온전한 의이신 예수님은 죽으시는데 도리어 그 주를 믿는다는 우리가 넉넉하게 산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독과 악이 가득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이 임한 자들을 죽입니다. 그렇게 죽임으로써 이 세상이 얼마나 독과 악이 가득한 곳인가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3. 이 땅에서 사는 법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잘 살아 보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악인이 형통한 곳이고, 의인은 핍박받고 고난 받는 곳입니다. 그것이 주로 말미암은 자들의 거룩한 고민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그러한 고민이 묻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73:1-17)고 합니다. 악인이 얼마나 형통한지 그렇다면 내가 매일 마음을 정하게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고 하는 일이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수록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는 고민이 이 땅을 사는 의인들이 하는 고민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박국 선지자도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박국서 1장에 보면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12-2:4)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의 심판을 위해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블레셋이 마치 자신들이 심판의 주도자인 양 포악한 행동을 일삼는 것을 보고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 불평하며 따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못 되었다 할지라도 블레셋보다는 나은데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하박국 선지자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느냐 그러므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이 세상에서 능력 있게 잘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스데반 집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가 간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훨씬 옳음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 땅에 무슨 미련을 두시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시고도 또 예배당에 오시겠습니까? 그래도 오신다면 참으로 주의 은혜입니다. 우리 함께 주님 오시기를 더욱 소망하며 또 하루라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기를 소망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시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가 아는 게임 중에 의자 주변을 돌다가 호루라기 소리만 나면 의자에 먼저 앉아야 살아남는 게임이 있습니다. 의자 주변을 손뼉 치고, 노래 부르며 돌아도 오직 관심사는 호각소리인 것입니다. 노래도 하고, 손뼉도 치고, 돌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의자에 앉는 것만이 관심입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에서도 성실하게 주께 하듯이 하십시오. 가정 살림도 그렇게 잘하십시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호각소리만이 관심이듯 의인된 우리는 오직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기다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곳은 의인이신 주님이 죽임 당하신 땅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분명하게 알아 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진바 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가를 바르게 분별하며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스데반 집사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이 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신자의 복된 모습과 십자가가 증거 되는 유일한 모습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스데반과 다른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4.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열심인 자들이 스데반을 죽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주의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는 자들이 예수님과 스데반을 죽임으로 무엇이 증명되는 것입니까?

6. 이 땅에서 하늘의 생명을 갖고 사는 의인들의 고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이 땅을 살아가는 의인된 우리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55 4월 10일 2부/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관리자 2011.04.09 1319
554 10월 6일 / 야고보서22. 내 형제들아 맹세하지 말라 2 관리자 2013.10.06 1319
553 2월 19일 2부 / 생명과 사망의 냄새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향기 관리자 2012.02.19 1312
552 7월 18일 2부 / 의로우신 아버지가 원하시는 거룩과 의의 신앙 관리자 2010.07.17 1298
551 6월 8일 / 사도행전22. (행5:12-16)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표적과 기사 8 관리자 2014.06.08 1248
550 5월 18일 / 사도행전19. (행4:23-31) 예수의 이름에대한 열방의 분노 11 관리자 2014.05.17 1229
549 5월 4일 / 사도행전17. (행4:5-12) 사람들에 의해 버려진 모퉁이 돌 관리자 2014.05.04 1210
548 4월 27일 / 사도행전16. (행4:1-4)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붙잡는 자 13 관리자 2014.04.27 1207
547 4월 6일 / 사도행전14. (행3:11-16)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관리자 2014.04.05 1153
546 8월 24일 / 사도행전32. (행8:9-25) 마술사 시몬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관리자 2014.08.22 1148
545 4월 20일 부활주일 / (마27:57-66)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의 능력 관리자 2014.04.19 1142
» 7월 6일 / 사도행전26. (행6:8-15) 지혜와 성령의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자들 관리자 2014.07.06 1135
543 5월 25일 / 사도행전20. (행4: 32-3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관리자 2014.05.24 1130
542 6월 1일 / 사도행전21. (행5:1-11) 성령을 속이고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관리자 2014.06.01 1128
541 7월 20일 / 사도행전28. (행7:37-45) 모세 그리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 12 관리자 2014.07.19 1065
540 3월 6일 / 로마서 27. (롬5:18-21)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관리자 2016.03.05 1007
539 6월 15일 / 사도행전23. (행5:17-32)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관리자 2014.06.14 1006
538 7월 13일 / 사도행전27. (행7:1-16) 아브라함과 할례 그리고 두 아들 10 관리자 2014.07.13 999
537 7월 3일 / 로마서 43. (롬8:12-14)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관리자 2016.07.02 965
536 6월 22일 / 사도행전24. (행5:33-42) 그 이름을 위하여 받은 능욕을 기뻐하는 신앙 관리자 2014.06.21 948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 37 Next
/ 37

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