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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브라함과 할례 그리고 두 아들

본문 / 7: 1- 8

 

 

  1. 자기 의

오늘 본문은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한 내용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 설교를 한 후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오늘 설교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들이 이를 갈며 돌로 쳐 죽이는 것인지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설교를 세 번에 걸쳐 보고자 하는데 오늘은 아브라함과 할례에 대한 내용이며 또 이 내용은 창세기 전체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 45절까지는 모세와 율법에 대한 것으로 출애굽기로부터 다윗시대까지이고, 46절에서 53절까지는 성전에 대한 말씀으로 다윗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인 54절부터 60절 까지는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결국 스데반의 이 설교 한편이 구약 전체를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내용을 잘 알고 있기에 설교 한 번에 창세기로부터 다윗시대까지 몇 분에 걸쳐서 설교를 하여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는 모르더라도 그 전체적인 역사는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동일한 성경을 말하는데 한 쪽은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죽고 또 다른 한 쪽은 그러한 자를 이를 갈며 죽이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런 비유가 적당한 것 같습니다.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치료를 받아 다 나았다고 붕대를 풀었는데 거울을 보니 자신의 얼굴이 쭈그러든 것을 보고 거울을 깨트려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기 싫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의 거울인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의 더러움과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기에 마음의 거울인 성경을 던져버리든지 아니면 회개하든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으면 자랑하게 되지만, 성경이 나를 읽어 버리면 회개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이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포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가지고 남을 누르고 자기를 높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을 좋아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그동안 인간 스스로 빛이며 진리라고 주장하고 따르던 것들이 모두 어두움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회개하고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깨트리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유대인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였으나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조상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음이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들으면 유대인들에게 나타난 반응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다윗을 왕으로 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과연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나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일요일 날 예배당에 나오는 것과 헌금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을 예수 믿는다는 근거로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내가 잘나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한 것들이 순전히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의 근거로 가지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우상이 되는 것이라고 허물어 버리면 어떻게 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열심을 내어서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전도하고 봉사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와서는 이게 뭐냐, 다 집어 치우라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시는 이 교회 나오는가 봐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헌신과 공로를 무엇으로 보고 저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하며 시험들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자기의 행한 일에 칭찬 듣기를 본능적으로 좋아합니다. 아주 작은 일을 해도 그것을 칭찬하고 격려하면 잘 해 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의 자랑거리들을 속으로 다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 행한 것 죄뿐이나 하는 고백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열심과 헌신은 어느 누구도 따라 갈수 없을 만큼 최고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자랑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이 요한복음 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두 해석의 차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약속들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스데반 집사가 아브라함과 할례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하신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내용을 받아 들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이나 스데반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면 자기들의 자랑들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이 요한복음 8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31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자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아들이 자유를 주어야만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전통과 확신과 자랑을 한꺼번에 다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논쟁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분뿐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서 즐거워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나의 말을 듣고 나를 믿었을 것인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독단적인 말에 그들은 참람하다고 하면서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할례를 받은 자요, 율법이 있고, 성전과 제사가 있는데 어떻게 죄의 종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만 있으면 믿음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너희가 무슨 말을 하여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믿지 않는 것을 보니 너희는 마귀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지금까지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이 죄의 종으로서 행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혈통과 행위 같은 것을 의로 여기고, 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로 여기고, 선으로 여기는 것을 죄라고 고발을 하는 선지자와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따라 열심히 목숨을 걸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아온 유대인들에게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고 합니다. 열심히 하긴 하였는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나 공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종종 그래도 인간에게 순수한 면이 있지 않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어떠한 선행이나 율법지킴이나 공적을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가 자유를 주어야만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을 자도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죄의 종이 되어 있는데 무슨 수로 인간이 죄를 이기고 의의 종이 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아브라함에 있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한 가닥 남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을 없이하고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3.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까지 들어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기도 하면서 바로 왕과의 만남을 통해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5장에서 나옵니다. 언약의 내용은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과 그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년을 지낸 후에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체결을 합니다. 언약체결은 짐승을 절반으로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언약을 어기면 너도 이 짐승처럼 죽는다는 것으로서 목숨을 건 언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지나가고 아브라함은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일방적 언약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걸고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언약을 받았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어 주실 줄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스마엘을 낳는 때에 아브라함은 86세입니다. 그리고 13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고 하시면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즉 모든 나라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그러시면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어른들이 할례를 받을 것이요 그리고 태어나는 아이는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할레를 행하고 나서 낳은 아이가 바로 이삭인 것입니다. 결국 이삭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난 후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창세기 15장에서 받고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기 실력도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99세 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을 낳았다는 것은 인간의 혈통으로 약속의 자녀가 오는 것이 아님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요 육적 할례가 할례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어떤 인간의 노력과 애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인 협력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홀로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하거나 구한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세상이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뒤 다 자르고 이 말씀만 가지고 봐라. 나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그러나 너는 믿지 않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유대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으로 자기 공로와 자기 자랑을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절을 인용하려면 반드시 13절까지 인용하여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고 합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므로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을 잘라버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할례인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식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나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령의 할례가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미 마음의 할례(10:16)를 말하고, 마음의 가죽(4:4)을 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로마서 2장을 보면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고 합니다.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면적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6:11-16)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따른 부르심과 택하심과 자비와 긍휼과 그 언약을 이루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에게 자기의 자랑이 나오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정말 겸손하여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남에 우쭐하지 않고 자기의 못남에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진리로 말미암은 생명의 모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그러므로 세상의 평가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나의 자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자기 이름과 자기 자랑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동시에 자기의 실패와 못남에 대하여서도 자유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더 많이 알아 가시고 더 많이 체험하시고 누리시고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스데반을 죽이는 것은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

2. 그 당시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의 자랑과 오늘날 우리의 자랑이 어떻게 같다고 합니까?

3. 요한복음 8장의 유대인들의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4. 성경은 이스라엘이 가졌던 인간적 열심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5.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세운 언약이 일방적인 언약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6.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떻게 다르며 또 그것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7.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8. 하나님이 허락한 이면적 할례를 받은 자의 삶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9.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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