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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형제들아 맹세하지 말라

본문 /  약 5:12


1.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하늘로도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맹세는 주로 자기 말과 행위의 정당함을 주장할 때 합니다. 하늘과 땅에 맹세코 내 말은 거짓이 아닌 참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의 맹세는 벌을 면하기 위해, 즉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할 때 하며 또는 자기 자신이 이루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 신에게 다짐할 때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만 하여 주시면 반드시 이 맹세를 지키겠다.’고 하는 일종의 서원 같은 것인데 아마도 이런 맹세가 우리들에게는 제일 많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맹세들은 구약에서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자기 며느리를 구하여 오도록 하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성전을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을 위한 문제에서 급하게 되면 무엇이나 대고 맹세를 하기에 율법에는 헛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2)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늘과 땅에 맹세하는 것보다 더 큰 맹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하는 거짓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거짓 맹세나 헛된 맹세를 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율법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신6:10-15)고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시며 ‘너희는 나만 섬길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돈이 없고 힘들어서인데, 돈만 많이 주고 어려움만 없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만약 인간이 풍족한 것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신앙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굳이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말라”(신6:12)는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인간은 풍족하고 넉넉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신자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은 생활이 힘들기 때문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도 아니며 자식이 말썽만 부리기 때문도 아니라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이유가 모두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여 환경만 좋으면 신앙생활에는 자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평안하고 넉넉함 가운데서 나오는 여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금방 낙심하게 되고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상대적 신앙에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여기 두 가지 맹세가 나오는데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맹세가 나옵니다. 그 맹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입니다. 그 맹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이름, 즉 다른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약속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의식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발설한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함과 진지함이 요구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는 것에는 그 이름에 경외심을 가지고 최고의 권위를 부여함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세 번째 계명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명세한 내용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거의 다 외우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교묘하게 그러한 맹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축소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3-37)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 전문가들인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고,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너희가 걸고 맹세하는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른 것을 걸고 맹세한다 해도 그것 또한 모두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 맹세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맹세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맹세를 한다는 것은 반드시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하늘과 땅에 맹세를 한다고 해서 그 맹세로 인해 그가 하늘을 줄 수 있고 또 땅을 줄 수 있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그런 맹세를 많이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말의 정당성을 위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또는 자기의 소원을 빌기 위해 명세하며 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상물이 맹세하는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에 맹세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되지 않는가 할 것입니다. 그래서 36절에 보면 “네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임의로 희거나 검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네 몸이 네 것 인양 맹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자기를 책임질만한 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도 또 몸도 내가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죽어가는 몸을 무슨 수로 자기가 관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웰빙을 외쳐도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의 머리로 맹세를 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2. 변질된 신앙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과 땅으로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았기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맹세가 어떻게 변질되는가 하면 자기들의 이익의 재료로 맹세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16-22)고 합니다. 무엇으로 맹세하든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율법의 전문가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맹세를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 하면,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도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금이 우선입니다. 제단보다 제물이 우선입니다. 맹세하는 사람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맹세를 하는데 맹세를 시키고 맹세를 받는다는 지도자들이 또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맹세는 반드시 지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된 인도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우리의 소원이 있으면 서원하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맹세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습들이 하나님께서 저의 사업을 이렇게 도와주시면 제가 반드시 무엇을 해 드리겠다는 것과 우리 아이 일류대학에 합격 시켜주시면 제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들입니다. 이런 조건부의 기도가 다 맹세입니다. 우리의 기도라는 것도 거의 이런 내용들입니다.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구할 내용은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결심이나 결단을 가지고 맹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자신이 독자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서는 맹세로서 그 계획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불신의 사람입니다. 그런 자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언정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맹세하고서라도 이루고 싶은 내용 중에,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든지 아니면 현재 주어진 것만으로도 너무나 과분한 은혜이니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같이 여김을 받을 지라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감사하다는 내용들이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이 없다면 우리가 맹세하고, 무엇을 서원하고, 작정기도를 하는 전부가 결국은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아무리 거창하게 포장을 하여도 한 꺼풀만 벗겨보면 내 영광이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을 맹세라도 하여서 이룰 수만 있다면 해보고 싶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삶과 신앙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신앙과 믿음이 엄청 좋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와 아니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지나치는 것은 다 죄라고 하며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그렇다와 아니다 라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야 할 때에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아니라고 하여야 하는 데에서는 그렇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경우에는 애매모호하게 답하고서 자기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맹세를 해도 자기를 위해 맹세하고, 그렇다와 아니요도 진리와 상관없이 자기의 이익을 따라 말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모두 다 죄 정함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죄 정함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위의 말씀에서 심판자가 문 밖에 계신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주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얼마나 헛된 맹세와 그리고 거짓된 그렇다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해 왔는지를 알 수 있고 그 결과 심판 외에 달리 길이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그 언약의 성취는 인간의 맹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맹세로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신명기 6장 10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그 맹세를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6-17)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맹세를 이루실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한 제물을 여호와의 맹세로 준비하십니다. 그 씨가 대적을 문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이루어내시는 그 씨를 통해 어떻게 대적의 문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5-16)고 합니다. 하나님의 맹세,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시고 이루심으로 그 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자기 백성에게서 하나님의 맹세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무엇에 예를 하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언약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성취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예만 하면 됩니다. ‘예’ 라는 말은 ‘아멘’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면 ‘아니요’는 언제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지 못하였다는 말에 우리는 ‘아니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성경의 모든 언약과 맹세와 순종이 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들과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언제나 예가 됨을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린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라고 하는 것이고, 무엇을 아니요 라고 하는 것인지 잘 분별하시어서 우리의 삶 가운데 거짓 맹세가 없이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오직 주 안에서의 예만 외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인간을 잘 모를 때에 신앙생활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다른 신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율법을 합리화 하며 사는 유대인들에게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영광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믿는 자는 맹세를 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우리가 그렇다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또 그것으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7. 하나님의 맹세를 어떻게 이루셨다고 말씀하며,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예와 아니오는 무엇입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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