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스데반의 죽음과 우리가 가야할 십자가의 삶
본문 / 행전 7:54-60
1. 죄인 된 인간
오늘 본문은 흔히 첫 순교자라 하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스데반 집사를 살게 하시어서 주의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면 더 잘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것도 비참하게 돌에 맞아 온 얼굴과 몸이 찢어지고 터져가면서 죽게 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 즉 예수 믿으면 무언가 잘된다는 생각들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것도 주로 목사와 예수 믿는 것에 나름대로 열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이 땅에 예수 믿는 나라들은 부강한 나라들이고, 예수 믿지 않는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라고 가르치면서 그래서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고 어려우면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렇다고 하는 가르침을 거의 진리처럼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순교한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을 잘못 믿어서가 아니라 참으로 잘 믿는 분입니다. 그의 설교를 보면 얼마나 정확하게 구약의 전체 흐름을 한 줄로 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이렇게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를 잘 믿으면 오늘 본문의 스데반 집사처럼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말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생각처럼 만약에 예수를 잘 믿었더니 부귀하고 장수하였다는 내용이 성경에 있다면 조사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서 세상에서 무엇인가 잘되어 보려고 하셨다면 생각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 본문의 스데반 집사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스데반의 설교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돌에 맞아 죽어야만 하는지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하여 보겠습니다. 우리는 세 시간에 걸쳐서 할례와 율법과 성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할례란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라고 이미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혈통이나 사람의 뜻과 정성이 아닌 도리어 그러한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으로 주어지는 한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할례인 것인데 유대인들은 육적인 할례를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란 왜 인간이 죄인인지를 알게 하고 그래서 왜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 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서 인간이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율법외의 다른 한 의를 향하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증거 하는 의인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이란 피 흘림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기능이 성전인데 그 죄사함은 짐승의 피가 아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온전한 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임에도 그 성전을 우상삼은 것에 대해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할례와 율법과 성전, 즉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좋은 것도 죄인에게 주면 그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도 악용하는 것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할례도, 율법도, 성전도 모두 자기 자랑과 자기 치장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을 스데반이 고발하자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질러된 것과 같은 일이 스데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스데반처럼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하는지 먼저 오늘 본문 앞에 있는 51절부터 보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행7:51-53)고 합니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치 아니하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핍박하였고 또 그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3장에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마23:29-36)고 합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길을 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믿고 따른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신자의 길
이제 오늘 본문의 스데반의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온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 하니 스데반을 죽이려 하는 자들이 더욱 견딜 수 없어 하면서 돌을 들어 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스데반은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면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스데반을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는 것은 쉼을 뜻하는 것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최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도 스데반처럼 되자. 스데반을 본받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과연 무엇을 증거 하면서 죽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율법과 성전을 모두 자기들의 자랑과 치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들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조차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 그리스도만 증거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스데반이 대단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그렇게 그리스도만 증거한 것인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하는 모든 일, 즉 세상에서 하는 일이든, 예배당 안에서 하는 일이든 그 모든 일을 통하여 무엇이 드러나기를 소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분들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의 크기와 성도의 수 그리고 교회의 어떤 시스템 같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반대로 그렇게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가진 교회에 속하지 못한 분들은 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부러워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이 왜 필요하고 왜 존재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관심이 다른데 있는 것입니다. 크고 멋있는 예배당에 있으면 은근히 자랑스럽고 그렇지 못하면 다른 것으로 자랑거리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전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느냐? 너희가 자랑하고 떠든 건물이 아니다. 그걸 알고나 있냐”고 하면서 자기 자랑과 위로를 삼기 바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스데반 집사는 자기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죄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환영할 만한 것들로 예수님을 증거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무엇으로도 포장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온갖 포장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왠지 세상에서 큰 상을 받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면 왠지 우쭐해지기도 합니다. 안 믿는 자들에게 한 번 보란 듯이 ‘저 사람은 예수를 믿어’ 하면서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어필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진리로만 증거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길입니다. 좁은 문입니다. 문만 좁은 것이 아니라 길도 좁은 것입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은 편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고 많이 갑니다. 그러나 좁은 문과 좁은 길은 협착하고 험하여 찾는 자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생명의 길이며 또 무엇이 진리의 길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 역시 십자가의 길, 즉 죽는 길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하고 예수 믿어서 이것저것 잘되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였더니 30배 60배 100배의 이익을 보았다고 하면 아마도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다 이쪽으로 몰려 올 것입니다. 아니 이미도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로 가는 길이며 또 그 길은 오직 죽음으로의 초대일 뿐입니다.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십자가로만 증거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좋은 것들을 미끼로 제시하여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시겠지만 그런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기능이란 망하는 자들에게는 망하는 소식으로 들려야 하는 것이어야 하고 또 반대로 구원 얻는 자에게만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으로 들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 그리스도만 존귀히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3-5)고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가리어지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증인은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 같은 자신이 깨어짐으로 그 안에 있는 보배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증거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6-18)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이란 사람들이 스스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주 받는 모습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실패한 모습인 십자가의 죽음을 누가 좋아하며 믿겠다고 나설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쳐 온 것입니다. 그러자 눈을 뜬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실패하여도, 죽어도, 손해를 보아도, 병이 들어도 상관없는 나라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그 보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가 드러나기 위하여서는 날마다 깨어지는 방법으로만 증거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자기 치장을 하면 그 안의 보배가 드러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보배가 없으니 오직 자기 치장에만 바쁜 것입니다. 여성들이 왜 화장을 하는 것입니까?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교회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굴에 기미, 주근깨. 여드름자국, 잔주름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피부가 있다면 화장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보배가 있다면 나를 치장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아도, 실패를 하여도,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살면서 “너 도대체 뭐니. 뭐가 항상 그렇게 즐겁고 행복하냐?” 하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런 소리 들을 만큼 행복한 적이 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혹시 우리에게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의 고백은 “예수님이 계시니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를 싫건 좋건 간에 자꾸만 죽음의 자리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야 행복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들이 사는 삶이며, 영광의 삶이며, 좁은 문과 좁은 길의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안에 보화가 있음으로 그는 돌에 맞아 순교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아닌 안에 계신 그리스도만 자랑하였음을 봅니다. 그리고 오직 그런 삶을 통해서만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존귀케 되는 삶이 나오게 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거부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운 것입니다. 죽어야 사는 하늘의 지혜를 매순간 맛보아 아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오늘 본문 내용인 스데반의 순교를 보며 우리가 고쳐야 할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은 무엇이며, 스데반의 순교로 인간은 어떤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까?
3. 같은 내용과 같은 것을 가지고 생각하는 유대인들과 스데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 십자가를 증거 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법 그리고 성경의 이야기는 어떻게 다릅니까?
5. 십자가가 다른 것으로 치장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일하신다고 합니까?
7. 보배를 가진 자들이 자꾸 질그릇을 치장하길 원하고 또 치장하려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믿는 자들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한다고 합니까?
8.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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