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와 그의 사명
본문 / 막 1:40-45
1. 나병환자의 등장
오늘 본문은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고침을 받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나병환자가 처음입니다. 그 전에는 예수님이 친히 찾아가셔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셨고 또 시몬의 장모의 열병도 간구하지도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가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가 처음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을 깨끗케 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면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것은 나병이라는 저주의 병에 걸려 있는 입장이라면 ‘저의 병을 고쳐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를 깨끗하게 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니라,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함으로 지극히 소극적으로 여겨지는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1-2)라고 합니다. 여기 1절에 ‘산에서 내려오시니’라는 말씀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을 배경으로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 온 내용이 산상수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의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즉 단순히 나병이라고 하는 인간의 힘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을 예수님이 고쳤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나병병자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나병은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서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나병에 걸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가족과 유대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서 생활했기 때문에 일반인으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나병환자였습니다. 이러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8:2)라고 말합니다. 나병환자의 이 말에는 예수님은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말은 자신이 고침을 받고 또는 받지 못하고는 오직 예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예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혹시 예수님이 나를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아니라 ‘예수님은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향한 나병환자의 간절함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만 자신의 모든 인생이 정상적으로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나병환자가 산상수훈이 끝난 후 등장하는 것은, 주의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 되는 것이고, 내가 곧 악하고 더러운 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주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야 말로 말씀으로 인해 새롭게 된 신자의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나병환자의 등장은 바로 이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나병환자의 간절함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 역시 이와 같은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전도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 후에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떤 자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주의 말씀으로 인해 새롭게 된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나병환자가 꺼낸 ‘원하시면’이라는 말 가운데는, 예수님은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분이 확실하지만 나 같은 자는 그런 예수님께 깨끗케 해달라고 요구할 자격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깨끗함을 입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의 신앙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의 뜻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설사 주가 자신을 깨끗케 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원하시면’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과 고백이 바로 말씀에 의해 새롭게 된 신자인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 신자를 새롭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의 인격과 도덕의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새로움은 굳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우리가 나병환자가 되어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본문의 나병환자가 예수님이 깨끗케 하여 주심으로 누리게 된 기쁨과 위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가 되어라’는 말은 일부로 큰 병에 걸려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겪었던 것처럼 실제로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고 미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나병환자와 같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나병환자와 같은 상황을 일부러 조작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고 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러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세상, 즉 천국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천국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이 말씀한 천국백성과는 너무나 달랐고 우리가 소원하고 구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천국백성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대로 도덕과 윤리의 규범 안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들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는 멸망의 자식으로 무너뜨려 버립니다. 나병환자는 그 몸 자체가 더러움 자입니다. 그 더러운 몸에서 깨끗함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만질 수도 없습니다. 만지게 되면 나병환자의 그 더러움으로 말미암아 만진 자도 같이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나병환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야만 합니다. 나라는 하는 존재는 그 자체가 더러움이기 때문에 깨끗함은 나올 수 없는 저주의 자식이라는 것을 자각해야만 합니다. 날마다 내 속에서 삐져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용서와 겸손이 아니라 오직 분노와 시기와 보복과 미움뿐이라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에 대해서 절망해야만 합니다. 나의 그 어떤 실천과 행함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다가갈 수 없고 또한 조금이라도 깨끗해 질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나병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병환자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를 향한 간절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만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신자는 자신의 의가 아닌 다른 의, 즉 예수님의 의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온 간절함인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고침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면 그 무엇으로도 고침 받을 수 없는 것이 인간, 즉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자는 자연히 예수님의 의를 향한 간절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땅의 것을 얻기 위해서만 삽니다. 삶의 모든 목적과 방향이 오직 땅의 것을 향해 있습니다. 땅의 것으로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 사는 이유이고 또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의 의에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의 등장하는 나병환자인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된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며 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고, 부정한 존재이며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깨끗케 하신 은혜가 그 마음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3. 깨끗케 하심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자의 고백은 오늘 본문의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너무 깊어서 감히 주님께 용서해달라거나, 깨끗케 해달라는 요구를 할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나 같은 자는 생명을 누릴 자격도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의 뜻에 맡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없다고 해도 낙심하기 보다는 지금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병환자의 놀라운 믿음인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주님을 알기에 나올 수 있는 믿음이며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1절부터 보면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막1:41-42)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죄에서 해방되고 깨끗하게 된 존재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이며 또 신자가 이 구원을 알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있다면 신자의 마음에는 ‘불쌍히 여김’이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을 잃어버림으로써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비판하고 판단하며, 경쟁하고 시기하는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나병환자와 같은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마음 깊이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주의 불쌍히 여기심을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쌍한 자인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없고 힘없어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이런 저런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며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이 불쌍한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악하고 더러운 존재로 살다가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눈에는 예수가 없는 자보다는 돈 없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불쌍하게 보인다면,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세워보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간이 또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십자가도 머릿속에 존재하는 십자가일 뿐, 자신의 인생과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십자가는 아닌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믿음을 마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천국도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고, 부활과 십자가도 모두 현실과 거리가 먼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4. 나병환자의 일
그렇게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 44절을 보면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막1:44)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엄히 경계를 하시고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된 것을 그냥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드리는 것으로 입증하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명한 것은 레위기 14장(1절부터 9절)에 나오는 것인데, 나병환자가 병이 나았을 때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로 가지고 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나병환자가 가지고 온 두 마리의 새 중에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아 피를 내고, 그 피를 살아있는 다른 새의 날개에 발라 날려 보내면서 나병 환자에게 ‘당신은 이제 깨끗합니다’라고 선언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주의 병인 나병이 나았다는 것은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어진 일임을 증거 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병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자신을 깨끗케 했음을 증거하고 자랑해야 하는 것이 깨끗함을 입은 사람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은, 나병환자가 고침 받은 것에 대해 알리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나병이 고침 받은 신기한 기적으로만 향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나병환자라는 실상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이 아니라, 내가 깨끗하게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를 찾는 것을 거부하신다는 의미로 그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런 뜻과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향한 관심을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만 예수님을 찾고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밖에 있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처지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로 사는 것을 비참하게 여기고 불쌍한 처지로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에 갈급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주를 향한 갈급함이 있게 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가 나병환자라는 것을 드러낼 때 그리고 나병환자라는 우리의 본질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나를 깨끗케 하시는 주를 향한 갈급함으로 주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나병환자의 병이 단지 나았다는 것이 깨끗함을 입은 자의 할 일이 아닙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증거해야 하는 것은 더러운 나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사명이며 전도입니다. 이러한 전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더러움을 보면서 십자가에 피 흘린 예수님을 찾게 합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주를 찾으면 주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결과이며 그 결과는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깨끗케 하시는 주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살아가는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예수님의 산상수훈 후에 나병환자를 등장시켜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뜻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나병환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4.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의 간절함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까?
5. 오늘날 주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나병환자와 같은 간절함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의 놀라운 믿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성경적으로 불쌍한 자란 어떤 자이며,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8. 깨끗하게 되었음을 모세가 명한 예물로 입증하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깨끗함을 입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10.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된 신앙고백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