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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본문 / 5: 1- 7

 

1. 우리의 필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그 도움을 주게 되면 우리는 구세주를 만났다는 표현을 합니다. 자기의 필요를 자기 스스로 채울 수가 없을 때에, 누군가가 그 필요를 채워줄 때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은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1:4)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악한 세대란 어느 특정한 한 세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힘의 논리로만 살아가는 세상적 사고방식과 그 힘을 최고의 가치로만 여기는 사고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러한 악한 세상에서의 건짐인데,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의 건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더 든든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구하며 또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필요한 그 힘을 달라고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주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고 하여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 말하지만, 누가복음 11장에서는 같은 말씀으로 그 결론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고 말씀하십니다.

여기보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좋은 것이 그저 세상을 사는 일에 좋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만이 하나님께 제대로 구할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의 구하는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만 모든 것들을 다 빼버리고 단 하나만 남기라면 무엇을 구하게 되겠습니까? 바로 성령, 즉 거룩한 영이 임하면 자신이 거룩하지 못한 죄인임을 알게 되기에 자기를 거룩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바울 사도가 다른 것들은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활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을 갖추고 살아가면서도 심지어는 필요치 않은 것도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갖추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마음껏 원하는 대로 갖추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에 목말라하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것을 갖추어 두고 살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으로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해도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갖추지 못했다면 헛일일 뿐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것은 갖추지를 못해서 초라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갖춘 자라면 그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갖춘 자로 산다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

지난 시간 말씀에 이어 오늘 본문 1절에도 보면 대제사장이라는 호칭이 나옵니다. 이는 구약에 있었던 직책이기도 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위해 세상에 오셨는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 것이고 그 일이 대제사장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5:1-4)고 합니다.

것은 구약의 제사장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 취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한 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무식하다는 것은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미혹이라는 것은 길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무식하다고 하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을 말하고, 미혹이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치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에 왜 굳이 대제사장이라는 인물이 필요한 것입니까?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제사를 드리도록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대제사장이라는 백성의 대표자가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께 나오면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대표자를 세워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와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살피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율법으로 심판을 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표해서 그들을 용납하여 속죄의 제사를 지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 자신도 연약하기에 그들을 용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존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장에 대한 말씀이고 이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표자로, 즉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대표자가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처지가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살피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긍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증거되고 부각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는 이 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담겨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 도우심을 세상을 보면서 확인하고 확증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문제를 더 힘들게 할 뿐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왜 간증이라는 것을 즐겨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간증에는 뭔가 특별한 체험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특별한 체험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신 증거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상대적으로 특별하지 않게 여겨지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극적인 체험을 한 사람보다 하루하루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 같은 자신의 삶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간증이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이러한 문제로 시험을 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하나님이 천사들을 동원해서 다치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어려움에서도 지켜줘야 그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노리는 것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훼방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죄인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을 하나님과의 화목에 있게 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역할일 뿐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을 믿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을 만나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짊어지시고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를 구원에 있게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음을 알아주는 것으로 신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처지가 어떠했기에 대제사장으로 오셔야 했는가를 깨달아야 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우리 신앙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우리의 대표자로 오신 것임을 말씀드렸지만, 사실 우리는 죄인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즉 예수님은 기껏해야 죄인들의 대표자로 일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이고, 이 낮아지심이야 말로 우리에게는 한없는 은혜며 사랑인 것입니다.

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은혜와 사랑과 긍휼하심이 무궁무진한대 어디에서 무엇으로 사랑과 긍휼을 체험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어려움에서 하나님이 내편인가?’라는 의심을 갖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편함이나 권세 그리고 부요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난과 낮아지심의 자리였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만으로도 그분은 낮아지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이라는 자리가 우리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표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모든 일들이 사실은 애당초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우리가 담당해야 할 몫을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 등장하셔서 모두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뒤로 하고 세상을 마주한 채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상관없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표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계셨던 그 자리에 우리가 나아가야 함을 뜻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우리 역시 있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대표자라고 해서 예수님이 홀로 가신 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우리는 딴 동네에서 내 멋대로 놀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간 그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이니만큼 우리 역시 그 길을 가기 위해 대표자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을 보기가 힘든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 예수를 세상의 자신들의 삶에 끌어들이기 위해 분주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무엇이 신앙인가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오셔서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겪게 되는 고통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봄에 있음을 아시고 예수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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