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완전한데 나아가라
본문 / 히 6: 1- 3
1. 본능적 삶
제사장은 세상에서 인식하는 소위 높은 지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사들 가운데 목사직을 제사장직과 동일시하면서 섬김을 받아야 하고 높임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사장직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의 모습일 뿐입니다. 즉 스스로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을 증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합니다.
여기서 신자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 역시 신자의 지위를 격상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신자가 어떤 위치와 역할의 자리에 있는가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즉 신자란 제사장처럼 희생하고 섬기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섬김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또한 섬김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섬기는 분으로 신자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들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는 단단한 식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 자신을 세워주기를 원했는데 오히려 자신을 불러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이 못마땅할 뿐인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우리를 있게 하신다는 것이 싫은 이것이야말로 ‘도의 초보’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도의 초보
오늘 본문에 보면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히6:1-2)고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버려야 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서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로 여겨지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버려야 할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것들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규정하며 버려야 할 것들로 오늘 본문에서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즉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즉 회개를 하라고 강조를 하는 시점에서 오히려 회개를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 또한 우리가 굳건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인데 이것 역시 도의 초보로 말하면서 버려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해할 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회개’를 버리라는 말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라는 말도 세례와 심판에 관한 교훈을 버리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말하면서 버리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는 행위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도의 초보로 규정되는 행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도의 초보로 규정되는 행위가 따로 있는 것이라면 결국 회개, 세례, 신앙 이 모든 것이 도의 초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도의 초보를 왜 관심의 문제로 봐야 하는가 하면, 참된 복음의 내용과 부딪히게 되는 원인이 관심 밖의 내용들로 일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즉 십자가는 받아들이고 믿겠지만 십자가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를 말하면서 좁은 길을 가야 하고,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미움을 받아야 함을 이야기할 때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심 밖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반발하기를 성경에 꼭 고난과 희생만 있단 말인가? 복도 있고 평안도 있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즉 성경을 자신의 관심과 일치된 내용으로만 끌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의 초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내가 잘되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이고,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어코 신자는 잘되어야만 한다는 고집만 내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회개를 한다고 할 때 그들이 하는 회개는 과연 무엇을 위한 회개를 하게 되겠습니까? 회개를 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또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그런 자들은 회개를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를 받는 수단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벌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회개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고 벌을 피하자는 노림수를 갖고 있는 이것이 바로 도의 초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회개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회개를 동원하는 그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둔 신앙이야말로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 받기를 원하는 신앙이라면 도의 초보일 뿐이며 반드시 버려야 할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도의 초보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은 신자에게 완전해지라고 하는 요구가 아니라, 완전한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곳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곳이란, 구원의 의미에서의 완전함을 뜻합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모자람도 또 부족함도 없는 그곳이 바로 완전한 곳입니다. 그곳은 의가 넘치는 곳입니다. 때문에 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이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100% 완전한 곳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의심이나 불안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는 이미 완전한 곳에 거하기 때문에 우리가 뭐가 보태야 할 것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완전한 곳에 거하기 때문에 복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구원을 얻기에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때문에 완전한데 거하는 신자에게 있어야 할 태도는 그리스도의 완전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행위를 보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늘의 복에 거한다는 이 사실이야 말로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복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것을 깨달을 때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라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 베푸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의 초점을 결코 자신에게 두면 안됩니다. 믿음은 나의 구원용으로 하나님이 선물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신자에게 구원용으로 주어졌다면 믿음 이후의 문제가 곤란하게 됩니다. 때문에 구원 이후의 문제가 단순히 나를 구원하신 것에 대한 보답의 차원으로 전락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지만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덕을 세상에 선전하고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2:9 / 표준새번역)라고 합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업적’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면 그분의 은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구원은 이 일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갑니다. 선악과 따 먹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어 불순종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이미 자기 자신에게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그런 인간이 하나님께로 그 관심을 돌린다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인생의 참된 가치와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자기만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참된 생명을 얻은 것에서 찾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인간 됨이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기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신자라는 신분은 우리가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는 교회를 하나 정하고 출석하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다.
신자는 맹목적으로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불러냄을 받았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내셨음을 알고, ‘왜 나를 불러 내셨는가?’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자신만을 향하던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러한 뜻과 계획으로 주어진 믿음을 오직 자기 구원용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나만 잘하고,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단지 신앙의 열심의 모습으로만 이해할 뿐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생각하는 이것 또한 도의 초보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 초보를 버리라고 권면합니다.
3. 허락하시면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히6:3)고 말합니다.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말을 한 후에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것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문제이고 허락의 문제이지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곧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계셨고,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안에 거하고 있는 인생인데 잘한 것이 있어서 복을 받고 잘한 것이 없어서 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고방식을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러한 사고방식은 도의 초보일 뿐입니다.
욥기 1장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대화가 나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는데 사단도 그 앞에 와서 섭니다. 여호와가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사단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말합니다. 사단이 땅을 여기저기 두루 다닌 것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세를 가지고 땅을 다스린 것을 말합니다.
땅을 두루 다니고 온 사단에게 하나님은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사단이 대답하기를 “9.~~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1:9-10)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생각입니다. 사단은 인간은 아무런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도 역시 하나님이 복을 줘서 재산과 자손이 많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식이 아닌 사단의 인과율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않기에 ‘내가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 없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뭘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별별 짓을 다해 봐야 믿음 없는 자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됩니다. 믿음 덕분에 잘하고 있는데 이것을 두고 인간이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혹 우리가 잘한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 덕분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말하려면 ‘하나님이 잘하신다’고 또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완전한데 나아간 신자는 완전한 생각을 하며 살게 됩니다. 완전한 생각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았으니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흠없는 완전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러한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리까지 인도하신 결과임을 알고 감사해야만 합니다. 완전한 분과 함께한 신자답게 완전한 생각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완전한 분과 함께 한 신자인 것이며, 신자의 삶이며 또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