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으로 아벨은
본문 / 히11: 4
1. 믿음
지난주 말씀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는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추상이며 보이는 것은 실체인데 실체보다 추상을 더 의지하고 신뢰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로 인해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증거 삼아 자신을 판단하고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비롯한 다른 누군가의 믿음의 여부를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판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실체는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가공되어 생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믿음의 증거로 강조하는 구제, 봉사, 기도 등등의 모든 행위들이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믿음이 있다면 그러한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믿음이 있는 자로 여겨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아마 지금 이 시간도 우리 모두는 똑같은 사고방식에 묶여 살아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39-43)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좌우편에 함께 달린 두 행악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이 행악자는 과연 믿음이 있는 자였습니까? 아니면 없는 자였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가 낙원에 있게 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이는 낙원에 있게 될 수 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한편 행악자는 분명 믿음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편 행악자에게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는 무엇 것입니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가 무슨 행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까? 분명 이 행악자에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의 증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이 있는 자였고 그래서 그 믿음에 의해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행악자에게서 볼 수 있는 믿음의 증거라면 자신과 함께 사형수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을 의지하고 자기 영혼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과 함께 죽을 자에게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어떤 가능성을 찾지를 않고 단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에 예수님의 처지, 즉 지금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상황은 무시한 채 예수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럼 사도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의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까? 아니면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행적은 각기 달랐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분량으로 산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분량의 행적을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도들 중 바울 사도가 가장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른 사도보다 믿음이 더 있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바울 사도에게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 즉 믿음의 증거물이 더욱 많으니까 다른 사도들보다는 더 좋은 믿음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사도들의 믿음에 차별을 둘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행위를 가지고 믿음의 증거로 삼아 믿음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대로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지 어떤 나타난 것을 가지고 믿음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즉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존재하기에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이미 갖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증거가 있다면 그에게 바라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막연한 추상이 아니라, 확실한 실체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실상과 증거로 주어진 믿음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이고 또 이런 면에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믿음의 위대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소개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믿음이 어떻게 일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를 보라’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쏟아부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 낸 믿음과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로써 천국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살았던 인물들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2. 증언
오늘 본문은 첫 번째 인물로 아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11:4)고 말씀합니다.
분명 앞에서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증거를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그게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하나님은 제물에 차별을 두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차별을 두고 그 제물을 믿음의 증거로 삼는다면, 결국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아벨과 동일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결론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벨의 제물을 오늘날의 상황에 맞춰서 적당히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그것을 믿음의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제물은 참 제물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두고 더 나은 제사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에 있어서의 차이인 것일까요? 아니면 제물의 종류의 차이인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물의 차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물의 종류의 차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4:3-4)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가인은 곡식을 기르는 자로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서 양을 드렸습니다. 즉 자기 소산으로 제물을 삼은 것이기에 제물 자체에 질적인 차별을 둘 수 없으며, 레위기에 보면 곡식도 제물로 등장하기에 제물 자체의 차이로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랐던 것입니까? 위 구절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이었지만,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린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3장에 보면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레3:16)고 말씀하고 또 레위기 27장에도 보면 “오직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 소나 양은 여호와의 것이니 누구든지 그것으로는 성별하여 드리지 못할 것이며”(레27:26)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본 것처럼 첫 새끼와 기름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즉 가인은 단지 자기 소산을 제물로 드린 것이지만, 아벨은 자기 소산에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있는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제물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아벨이 바친 양을 증언한다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통해 나타난 아벨의 구별 의식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구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자신의 소산을 바치는 가인의 제물은 단지 바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라는 수준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교인들이 바치는 행위에 중점을 두면서 제물에 신경을 쓰는 것, 다시 말해서 많이 바치고 정성스럽게 바치고 좋은 것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가인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은 예물이 마음에 들어서 아벨의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 자체가 달랐던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가인은 바치면 복을 주실 것이라는 수준이라면, 아벨은 자신을 포함한 자기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벨의 예물을 받으셨다기보다는 아벨의 믿음을 받으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첫 새끼와 기름을 믿음의 증거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첫 새끼와 기름을 바친다는 것도 믿음이 없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3. 말함
오늘 본문 하반절을 보면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고 합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은 죽었으나 그로 하여금 구별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한 믿음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벨로 하여금 첫 새끼와 기름을 구별하여 제물로 바치게 했던 그 믿음이 여전히 살아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아벨에게 있던 믿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이며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바치면 복 주시겠지’라는 생각으로 뭔가를 바치고자 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여호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 자신 조차도 여호와의 것이니 내가 여호와께 따로 바칠 것은 없고 다만 여호와가 나를 쓰실 뿐입니다.’라는 이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믿음이 아니라면 ‘바치면 복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내 것을 바쳤으니 그 대가로 복을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렸을 뿐인데 그 대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떠나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기준하여 믿음의 여부를 판단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구별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떠나지 않게 합니다. 이런 신자의 삶은 분명 믿음이 없는 사람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벨의 제사이며 믿음의 증거이고 또 아벨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하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의 일하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