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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우리가 걸어야만 하는 거룩에로의 길

본문 /  요17:19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단지 천국 들어가는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자로서 변화되고 훈련되는 과정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도로서 구원받은 자들이 쌓아야 하는 훈련과 거룩의 길이 어떤 내용인가 하는 점입니다.


1. 하나님의 일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뜻과 궁극적인 목표를 제자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1-24) 여기 말씀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기도 하고 또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가 하는 갈림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길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그 길에 서 있는 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는 모든 것들은 더러운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시하시며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곧 하나님의 길이요, 거룩의 길이기에 우리들도 주님이 가신 그 길에 들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같은 그 길을 가는데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리가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설명이 빌립보서 2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이 말씀은 복음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절대 복종하신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거룩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보인 가장 중요한 모범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길을 가는데 있어 주님 자신의 힘과 지혜와 열정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모든 주장과 생각과 권리들을 다 아버지께 이양하고 복종하신 것입니다. 이런 복종이 거룩에로 가는 길에 있어서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느냐에 관한 싸움이기도 한데 방금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기를 아버지 앞에 얼마나 순종했느냐 하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순종을 좀 더 확대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5장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10) 여기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고난을 통해 배워야 할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결코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하십니다. 이 온전함은 예수님 쪽에서 보면 예수님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일 때문에 나온 말씀으로 제사장이 되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한 일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참 인간이 되는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것입니다. 날아가고도 남음이 있으신 분이 기어가는 자리에 오셨으니 그야말로 고난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이가 자기가 지은 영역 안에 자신을 넣어야 되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 대하여 온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이 가졌던 영광과 권세를 버리시고 자신을 비우고 종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응하는 자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거룩의 중요한 원리가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순종의 길을 걸으시되 우리에게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걸으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거룩에로의 길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순종으로 걸으셨지만 여기에는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두 기적의 주인이시기에 언제든지 원하시기만 하면 기적을 만들어 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자신이 가셔야 할 순종의 길을 기적이라는 것으로 대체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은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의 영역의 것이 전부가 아니라 더 큰 초월적인 영역인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기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에의 길로 가는 방법은 순종밖에 없습니다. 거룩에로의 길이 기적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의 실수와 결함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가장 큰 결함은 신앙을 내 목표와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자신의 목표와 뜻을 쉽게 성취하기 위해 기적을 요구하지만 기독교는 내가 가진 계획과 목표와 욕심을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하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 자체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는데 있어서 결코 기적으로 대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들로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하늘나라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의 죄의 본성은 죽어지고 나의 생각과 욕심을 극복하고 새로운 하늘나라의 백성에 걸 맞는 자로서 고쳐지기 위해 더욱 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순종에는 이런 것들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여기서 보면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길이란, 주님이 가신 길을 좇는 것이며, 주님이 가신 길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하기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변화의 요구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거룩함을 이루는 방법으로서 무슨 거창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말로 요약하면 옆 사람과 비교하여 괜히 시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늘 하는 일이라는 게 문제 있는 사람 색출해 내는 일을 업으로 삼다시피 하는 습관입니다. 누구는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문제다 하는 것 밖에는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양심은 한 없이 무뎌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저들이 저렇게 악한데 그래도 난 이정도만 살아도 양호하다’는 생각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같은 사고방식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방해 요소인 것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헌금도 하고, 주일도 지키고, 직분도 그럭저럭 감당해 내고 있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의 양심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사람들 앞에서의 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거기엔 다른 사람을 끌어 들일 수 없는 자리이며, 핑계도 댈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믿지 않기에 모여서 한다는 말이 누가 어떻고, 누군 어떻더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며, 목표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강대상에서 매 주일마다 이단을 벗긴다 하여 그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과 싸우기 위해 세워진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일을 증거하며 그 안에서 완성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풍성함을 경험케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단과의 싸움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우리의 첫째 목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과 그 안에서 부름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계획과 목표를 요구받고 있는가를 알아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며 그것을 경험하여 감사하며 찬송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가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구받고 있는 거룩에로의 길입니다.


3. 사랑의 훈련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12:20) 신자에게 있어서 원수 갚는 것이 첫 번째 목표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변화되고 성숙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누가 내게 십 원어치 악하게 하면, 나는 천원어치 악하게 하고 싶어 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예수 믿고 있는 지금에도 아직도 남아 있기에 우리에게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그곳에서 뜻밖에도 우리는 원치 않는 악한 자들을 만나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만나 내가 얼마나 악을 악으로 반응하는 것이 없어졌는가를 살펴보게 함으로 얼마나 더 거룩에로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 우리에게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5:13-14) 바로 이것이 거룩으로 가는 과정이요 길입니다. 신자는 거룩으로 초대 받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훈련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온 율법의 마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웃과의 사이에서 싸움이 나거든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알고 부딪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할 만한 사람보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의 삶속에서 유일하게 벽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해결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거룩에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어질 때 비로소 거룩에의 길로 진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옆에 모아 두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이치에 불과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독교에는 능력과 기적도 있지만 기독교의 신앙을 영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도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과 예언의 능이 있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주를 향한 열정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은 헛된 것이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은 내가 어떤 정열을 가졌고, 어떤 기도의 능력을 가졌고, 천사의 말을 들었는가가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옆 사람을 영적으로 죽이는 일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아무와도 화해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 사랑의 길을 가야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담 쌓고 지내는 형제자매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웃고 지내며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싸움만 안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때로는 지고 짓 밟혀 줌으로서 마침내 이루어지는 그런 화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하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하루도 못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길에 항상 요구되는 것이 바로 순종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과 요구에 나를 복종시켰느냐의 싸움입니다. 그 순종의 길을 걸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놀라운 기적과 만족과 상상치 못했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현실 세계를 잘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로 전락해 버린 것은 슬픈 일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되어야 할 것을 도리어 밖으로 돌려서 ‘누구는 왜 이래?’ 하는 것에다 자신을 감춰 버리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 교회가 점점 더 커가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는 숨는 교인들이 더 많이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일을 하다 보니까 상처받는 일 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이제는 큰 교회에 묻혀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처를 받는 이유는 우리의 요구가 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들을 향한 요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도 보면 처음에는 세계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좀 더 성숙해지면 ‘이 교회를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마침내 ‘이 못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하게 됩니다. 목사마저도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목사들이 하는 가장 큰 실수중 하나가 ‘저를 세우셨으니 제게 열 명의 확실한 일꾼을 주시면 전 세계를 뒤엎어 놓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믿음 있는 좋은 사람이 아니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좋은 장로, 좋은 집사, 좋은 성도가 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시작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가주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언제나 자신에 관한 싸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내가 가야할 신앙의 길, 성화의 길, 거룩에로의 길을 다른 사람으로 때우지 마시고 다른 일로서 대체시키지 마십시오. 이 길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길이기에 우리는 이 거룩에로의 길을 반드시 가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큰 훈련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이 없으며, 거룩이 없는 자인가를 깨닫고, 아직도 얼마나 악이 충전되어 있는 자인가를 깨닫고 끊임없이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의 길입니다. 스데반 같이 자기를 향해 돌 던지는 자에게 그 마음에 복수심이 없고 진정한 사랑이 있는 놀라운 하나님의 성품에 도달할 수 있는 우리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성경에서 거룩의 길과 죄악의 길은 무엇으로 구분 될 수 있습니까?

2. 예수님이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기적을 동원되는 이유와 거룩의 길을 기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우리가의 신앙생활의 첫 번째 목표는 무엇입니까?

5.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원치 않는 자를 만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6. 신앙은 언제나 자신에 관한 싸움이라는 뜻은 무슨 의미입니까?

7. 신앙고백 및 다짐 기도를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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