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은혜를 받은 자여
본문 / 눅 1:26-38
1. 우발적 은혜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서는 누가복음 1장 1절에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함으로 이것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 하여도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도리어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믿기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서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차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사실을 사람들이 믿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마리아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 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불가항력적으로 오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노래하며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1:26-30)고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서 세례요한이 태어날 것을 사가랴에게 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이 6개월 후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소식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 소식의 첫 번째 내용은 28절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하는 인사입니다. 예루살렘도 아닌 시골 변방인 갈릴리 나사렛의 처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처녀가 놀라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이냐’고 합니다. 그때 천사가 일러 가로되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을 따라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기치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런 행위를 하였으니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런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예측 가능한 은혜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행위로 은혜받을 조건을 만들어 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은혜받을 조건을 만들어 은혜받고자 하는 것을 상인들의 거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결코 은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사람의 기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서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이 나타났지만 그런 표적과 기적을 일으킨다고 사전에 광고할 수가 결코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때그때 사도들을 사용하실 뿐이지 사도들이 능력을 자기의 소유물인 양 늘 소지하고 다니며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어느 장소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하면 반드시 은혜를 받는다는 말들에 속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결과가 어떻습니까? 물론 사람들은 다 은혜를 사모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은 다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기에 은혜를 달라고 하고 또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어쩌면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런지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불가항력적 은혜
오늘 본문 31절에 보면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1:31)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그 은혜의 내용이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은혜로운 소식입니까? 요즈음은 시집을 가지 않아도 아이를 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유대의 율법이 지켜지고 있는 땅에서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혼한 자가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한 정혼녀를 거부하면 그 정혼녀는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돌에 맞자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이 도망을 쳐서 산다고 하여도 그런 여자가 살아갈 길이 막막한 시대가 이 당시의 시대적 환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마1:18-19)라고 합니다.
정혼자 요셉이 정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가만히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롭다는 수준이 임신한 사실을 공개해버리면 맞아 죽을 것인데 조용히 정혼을 없는 것으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데리고 오라고 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신세 망쳐놓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경은 노아는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파트 마련하느라 바쁜데 노아의 가족은 방주 만드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준비할 틈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는 사모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요즘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은혜를 받아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주신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로 살았고,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고, 모세는 애굽의 영광과 보배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길을 갔고, 전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어떤 자는 더 좋은 부활을 받기 위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고 어떤 이는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싶은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받기 싫어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모든 이들은 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로는 은혜를 이야기하지만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또 그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면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한다는 것은 나를 지으신 분을 위하여 내가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은혜는 사람들이 스스로 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살리는 것이 제일 우선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든 교회든 신이든 간에 오직 나를 살리고자 할 뿐인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나를 세상에서 멋지게 살려주면 그런 가족과 교회와 신은 좋은 것으로 인정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어렵게 만들고 고생스럽게 하고 심지어는 죽는 자리로까지 몰아넣는 그런 이웃과 교회와 신은 본능적으로 인간은 죽어도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따르라는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은혜는 우리가 원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장로교에는 칼빈의 5대 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전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에 인간의 어떤 조건을 보고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는 것은 인간이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며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을 끝까지 견고히 인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곳도 별로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인간이 자기 하기 나름대로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도 인간이 자기 하기 나름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복음이 아니고 그냥 사람들이 세상에서 만든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원해서 받은 은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부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지 아니하였음에도 아들 이삭을 주시는 것처럼 또 사가랴가 믿지 아니하였음에도 세례요한을 그 가정에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능치 못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오늘 본문에 마리아도 입은 것이며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또한 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3. 은혜의 고백
그러면 그런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다시 오늘 본문 31절부터 보면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33)고 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 말씀을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도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때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당시 남 유다는 적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그들을 이길 것이라 하며 이길 표적을 구하라고 하자 남 유다 왕 아하스는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아서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하는 불신앙적인 대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하는 식으로 주신 약속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라고 하신 예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남을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인데 주 하나님께서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셔서 영원한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였다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고 너의 왕위를 영원하도록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상황은 이미도 다윗의 왕위는 세상적인 면에서 끊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나서는 다윗의 왕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끊어지지 않고 요셉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마1:20)리고 하여 마리아의 정혼자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윗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고 너의 왕위를 영원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다윗의 왕위가 계속될 것을 말씀하는 것도 아니고 또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지상의 왕국을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왕국, 즉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나라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왕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은혜를 받은 마리아는 천사의 이 말에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라고 합니다. 천사가 말하는 이런 어마어마한 내용을 마리아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 자기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내용을 유대인들이라면 다 기다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소식이 갈릴리 나사렛의 한 시골 처녀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처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신이 가당키나 한 말이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천사가 35절부터 보면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5-37)고 대답합니다.
한마디로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뱄다고 하며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무엇에 능치 못함이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오직 자기 소원 이루는 일에 동원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구함은 결국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인간의 정욕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어졌고 또 그 약속들을 이제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리아가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즉 불가항력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복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는 자기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부인되고 자신이 버림을 받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리아를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고 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라는 이 고백이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무슨 약속을 받았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조차도 상관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고백과 동일한 믿음을 예수님이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등장하는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자기 수하에 사람이 있어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인 백부장이 자기 부하에게 돌격 앞으로 라고 말하면 그 부하는 그 자리가 죽음의 자리라고 해도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히 천하를 만드신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따지지 않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종인 마리아의 또 오늘날 동일한 은혜를 받은 우리의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까지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대로만 세상을 이끌어 가실 뿐입니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결론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마리아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이 고백이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누리고 사는 우리의 복된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