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으로 홍해를
본문 / 히11:29
1. 히브리서의 의도
우리가 보고 있는 히브리서가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믿음으로 가지라’거나 또는 ‘이런 믿음을 본 받으라’는 권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줌으로써 믿음의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지난 성탄 메시지로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는 은혜를 입었으니 마리아처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거나 또는 지난주 신년에 나누었던 메시지처럼 ‘나는 주의 은혜를 입은 자이니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나로 하여금 누군가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가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가 맞는지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인간의 결단과 노력이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그 행한 것으로 자기 자신의 공적을 쌓는 일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그렇게 산 자와 그렇게 살지 못한 자로 나뉘게 되고 또 그 결과는 그렇게 산 자의 믿음은 우월하고 그렇게 살지 못한 자의 믿음은 가난한 믿음으로 여겨지는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이 쌓은 공적은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3:10-15)고 합니다.
믿는 자들은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공적을 쌓게 되는데 그것이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너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워진 공적에 대하여 불로써 시험을 하시는데 나무, 풀, 짚은 불에 태워져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진 공적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 것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계21:9-11)고 합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어린양의 신부를 보이겠다고 데려갔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에 대하여 11절 이하부터 계속 보여주는데 그 모든 모습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진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을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고 합니다. 결국 남편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은 나무와 풀과 짚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 즉 인간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드러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세워진 것만이 진정한 신부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믿음에 대해 바르게 정립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믿음을 우리는 우리 멋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고 붙들면서 자신이 믿음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부터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생명이 되는 믿음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2. 믿음으로 건넌 홍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존의 생각으로 이해하자면, 아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보시고 홍해를 열어서 건너게 하셨다. 믿음은 이런 기적을 일으킨다. 우리도 이런 놀라운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서 기적을 일으키는 삶이 되자’는 식의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의 믿음을 촉구하고 부추기기 위해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과연 이스라엘에 홍해를 앞에 두고 두려움이 없이 믿음으로 건너기에 홍해가 열렸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면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4:10-12)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곳에서 죽게 하느냐. 이렇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애굽 사람의 종으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는 원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아무리 봐도 이스라엘이 믿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으로 본다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오히려 홍해를 건널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차라리 애굽과 함께 멸망을 받는 것이 마땅한 자들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한 능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애굽에 있었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인간 자체가 애굽과 다른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인 죄를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 역시 죽어 마땅하고, 애굽과 함께 망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는 것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써 살아난 이스라엘은 과거와는 다른 존재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어린양의 피와 관련되지 않았고,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올 때는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존재로 나오는 것입니다. 즉 홍해 앞에 있는 이스라엘은 그냥 이스라엘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써 살아난 경험이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죽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이 죽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 자가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이스라엘이 죽는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곧 생명이라는 사실이 무산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널 만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어린양의 피로써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신분이 홍해를 건너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애굽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애굽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달라집니다. 과연 무슨 다른 점이 있기에 한쪽은 생명이고, 다른 한쪽은 사망이 되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기는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별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한 것이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홍해를 건너게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는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도 아니고 그들의 원함도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는 어떻게 유지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붙들고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었기에 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신자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 안에서 ‘신자’로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신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수준을 보자면 우리 역시 홍해 앞에서 원망하는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믿는 척하며 살지만 그런 우리에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문제만 생기면 죽는다고 소리치며 원망하는 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신자를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근거가 되어 믿음이 없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가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택하고 부르신 관계는 믿음으로 인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믿음으로 천국 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잘 살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를 백성의 자리에 붙들어 놓고 계신 결과로 천국에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애굽 사람이 시험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어떤 생각이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처럼 홍해로 들어가게 하였겠습니까? 애굽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보면서 ‘저들이 건너는데 우리도 건널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즉 애굽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참된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또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있는 겉모습만 보일 뿐, 그들을 건너게 하시는 분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건너면 우리도 건널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이러한 생각은 결국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이나 자기들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같은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자신들과 섬기는 신이 다를 뿐 우상을 섬기는 자신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이 세상도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를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들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자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기에 천국이라는 것도 누구든 착하게만 살면 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 홍해를 건너면서 오직 하나님이 택한 자만 건널 수 있음을 보지 못한 것처럼, 세상은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허용된 구원을 보지 못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별에 대해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잘만하면 누구나 갈 수 있는 천국이 그들이 가진 상식으로 얼마든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성’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를 붙들고 있고 생명에 있게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는 전혀 무의미하고 무능력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한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하는 욕망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복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우리가 잘해서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가 나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백성이라는 관계 안에서 신자는 결국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백성의 관계 안에 붙들어 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
시편 100편에 보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100:3)라고 합니다. 여기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맺으신 백성이라는 이 관계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믿음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 관계에 붙들어 놓기 위해 간섭하시고 책망하시면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믿음임을 기억하시고 범사에 감사와 찬양의 삶이 가득한 예원가족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