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본문 / 히12:25-29
1. 신자의 현실
창세기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경고는 그냥 엄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어떤 운명과 현실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처한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살았다 하나 죽은 것’이라고 하는 이것, 즉 육체적으로는 살았다고 하나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상태로 죽은 이것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외면하고 산다기보다는 아예 그러한 인간의 현실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현실을 이야기하면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죽음을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얼마든지 인정을 하지만, 영원한 죽음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죽음은 인간이 실제적으로 겪는 것이 아니기에 무시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를 죽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원한 죽음을 깨달은 사람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영원한 죽음이라는 인간의 현실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의 현실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불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 즉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시내산에 강림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은 심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분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비거룩, 즉 자기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주 말씀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시내산이 아닌 시온산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른 시온산에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무서움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을 모두 담당하신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가 있는 시온산이 이른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희생의 피로 인한 새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로 인해 살아난 새 생명의 현실이 참된 것임을 알게 된 신자라면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4-25)고 말씀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새 생명의 세계를 제외한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에 불과함을 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소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가 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고 산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겨 있는 뜻과 마음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새 생명의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도 주안에서 이해하지 못하기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게 되는 것입니다.
2. 소멸하는 불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12:25)라는 말을 합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자, 즉 모세의 경고를 거역한 자들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를 거역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고를 거역한다는 것은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향해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을 죽이시는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스스로 진노를 자초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사건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자체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시내산에 불로서 강림하신 하나님에 대해 무서움과 두려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무서움을 보지를 못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부어져야 할 진노와 심판을 홀로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그 가치까지도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9)고 말씀합니다. 소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이처럼 심각한 현실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는 것에 대해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면서도 그 모든 일을 일으키며 세상을 향해 심판을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멸해 버리시는 하나님 앞에 잘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잘나고 높아 봐야 결국은 모두 무너지고 소멸될 것에 불과할 뿐인데, 소멸하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를 쓰고 기도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기에 그런 모습만 보이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소멸의 대상에는 우리 역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 무엇으로도, 우리의 착함과 선행과 열심 등 그 무엇으로도 모든 것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을 극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소멸하시는 세상에서 우리를 끄집어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의 세계에서 건지셔서 피의 세계로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가 바르게 안다면 어찌 우리가 이른 피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한 우리를 보호하시는 피로 인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소멸의 세계인 불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인 피의 세계로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의 세계인 피의 세계는 우리가 희망한 세계도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이른 세계도 아닙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놀라운 뜻에 의해 되어진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피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인한 새 생명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우리가 받은 나라
오늘 본문 26절부터 보면 “26.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6-28)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에는’이라는 말씀은 모세가 경고할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땅만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흔들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흔들리고 변동될 것들은 다 파괴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변동되지 아니할 것들만 영원히 남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받은 나라가 바로 진동치 못할 나라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계속될 나라에 소속된 자로 새롭게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29절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12:29)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흔들어버리고 또 불태워버리고 나서 남게 되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8-13)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도 불살라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로운 창조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의에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기에 새롭게 창조된 의인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거나 또 우리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나라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나라, 즉 의에 거하는바 그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만을 남기시기 위하여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땅과 하늘까지 흔들어버리시고 불살라버리시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변동되고 불탈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시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자기 아들의 피로 창조된 세계만을 남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범죄 하자 사후대비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8)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우리가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합니다. 이상한 논리 같습니다. 은혜로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기에 이제는 은혜를 갚자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고 하지 않고 왜 또다시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진동치 못할 나라는 무궁한 은혜의 나라입니다. 도무지 은혜를 갚을 수 없을 만큼 은혜가 풍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은혜를 갚을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거저 주어야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공급받아야 살아가는 인간이 그 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살겠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제부터는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받고 살겠습니다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 은혜를 받았기에 이제는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행함의 그럴듯한 유혹을 하여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를 받았기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세상의 참된 현실과 실체, 즉 세상은 진동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바라본다면 세상의 것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만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만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희미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과 실체를 소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허락하는 생명의 피의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서 보이는 것만을 참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르게 하신 생명의 피의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알게 되었다면 오직 그 세계만을 소망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주의 은혜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고, 믿지 않는 것을 믿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분명 그 뜻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답게 성취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