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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형제 사랑

본문 / 13: 1- 3

 

1. 설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어떤 것도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이것은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체를 말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의 인간의 출발은 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 대해서는 전혀 무능력한 존재로 출발한 인간이라면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마음만 먹으면 또 의지만 있으면 실천 가능하다고 하는 생각으로 접근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으면 믿음으로 실천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그 역시 인간의 열심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에 인간의 열심이 보태어 져서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오늘 본문을 본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실천을 요구하는 내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을 보면서 형제를 사랑하자 2절을 보면서 손님을 대접하자 그리고 3절을 보면서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자라는 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피기 전에 먼저 히브리서 12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8-29)고 말씀합니다.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그 존재는 자체가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자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결국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인 13장에서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받았으니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은혜를 증거하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앞에서 은혜를 받자고 말씀하고 그리고 그 받은 은혜가 나를 살리는 것이라면 결국 그 은혜를 받은 자에게서는 형제 사랑으로 또 손님 대접으로 그리고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는 은혜를 안다라는 말이나 나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하려거든 자신에게서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과 용서와 같은 모습이 보이는가를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런 주의 말씀 앞에서 은혜받았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형제 사랑

먼저 형제 사랑은 자신을 포기할 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신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어떤 율법 교사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고 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10:29)라고 묻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10:36)라고 묻고 율법 교사는 자비(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를 베푼 자라고 답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도와주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해와 번거로움이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면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 그 일,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10:34-35)고 하는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강도를 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은 이미 자신을 포기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 어떤 손해와 번거로움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행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자비, 즉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너 자신을 포기한 자로 살기를 원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자기 사랑으로 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형제 사랑이 나를 포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자신을 포기한 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물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크게 되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길이고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말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세상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추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손님 대접

2절에서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말을 하지만, 손님 대접 역시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손님은 나그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본문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13:2/ 공동번역)라고 하며 또한 우리말 성경으로도 보면 나그네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13:2)라고 하여 손님을 나그네로 해석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라고 하여 믿음의 조상들을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합니다.

또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1-2)고 하여 베드로 사도는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

단순한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백성을 나그네라고 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오늘 본문 1절에서 말한 형제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과 롯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대접하였는데 그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두 사람은 천사였습니다.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장래에 대한 일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향한 두 천사의 모습은 역시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영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나그네를 자기들의 정욕을 풀 대상으로 삼아 상관하고자 끌어내려고 하였지만 욥은 나그네인 그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후에 그 소돔과 고모라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그네를 영접한 롯의 가족은 구원되지만 나머지는 불과 유황불로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물론 롯이 구원되는 것은 나그네를 환대함으로 구원받아야지 하는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19:29)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하나님께 이런 은혜를 입은 증거가 나그네를 대접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대접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나온 이후에도 율법에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자주 말씀하시기를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22:21)고 합니다.

또 신명기 10장에도 보면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0:18-19)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 그리고 꼭 나그네도 포함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나그네가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0-11)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신데 주인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주인의 영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가난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인을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접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죽여 버린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가난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자기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자만이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대접받은 우리

왜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가 나그네인 줄도 모르고 사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살리시고 의롭게 하시는 대접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대접이 우리를 강권해서 대접하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는 달라야 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분명히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그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나만 사랑하는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나만 사랑하고자 하는 본성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기에 그 순간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내가 원하고 내 이익만을 추구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손해가 되고 번거로움이 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분명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툼과 분노 시기, 이러한 모든 것은 분명 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서는 여전히 다툼과 분노와 시기가 나타납니다. 그러한 자신의 실체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소원합니까?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사랑이 없는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나만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내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사랑에 파묻힌 자신을 미워하기에 그런 나를 다스리시고 징계해서라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기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기도는 다릅니다. 신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소원 역시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과연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순종되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신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세상 속의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 자신입니까? 세상에서 어떤 인간이 되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산다면 그의 마지막은 성경이 언급한 대로 소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한 심판이 전부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부자로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나사로로 살기를 원합니까? 비록 거지라 해도 그 마지막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의 자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나에게서 포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소원하며 사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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