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본문 / 요 8:31-36
1. 인간의 실상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의 후손인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아담의 타락 후에 죄인이 되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본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굴레가 되고 또 번뇌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벗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불교에서 승려들이 평생 고행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힘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날 뿐입니다.
사람이 만약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자가 없음을 전제한다면 그러한 자유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는 무슨 의미인 것입니까? 과연 사람이 자신을 벗지 못한 상태에서도 자유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에게 매어 있고 또 자기 자신이 짐이 되어있다는 뜻임을 생각한다면 자유는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자유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으로 연결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에게 짐이 된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고 그로 인해 불만족과 염려와 실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의 현실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도 짐이 되어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3:32)고 말씀합니다.
자유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진리가 곧 우리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뜻이 됩니다. 평생을 고행으로 마무리해도 안 되는 ‘자유’라는 엄청난 일이 진리로 된다는 것은 진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큰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인식하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때 신자는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보시기에 죄
사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신앙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것은 신앙을 수단으로 해서 신으로부터 자신이 기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받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해 신을 섬겨야 하는 공식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을 위한 신앙 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신앙 세계에 뛰어드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신앙 세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의 신앙 세계를 지키고자 했고 그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37절에 보면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라고 하며 또한 40절에도 보면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8:40)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8:33)라고 반문합니다.
이들이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은 이들은 자유하지 못한 상태를 종의 신분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 된 적이 없는 자신들에게 자유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는 그들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34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합니다. 죄의 종이 유대인의 현실이었고 오늘 우리 모두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바라보는 그들의 현실은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며 사는 의의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죄가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의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한마디로 자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인간이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고, 자신의 복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자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러한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속에 있을 곳을 찾지 못하게 되고,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두지 못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받지 못한 자의 말씀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3. 참 자유
그러면 진리는 어떻게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죄는 인간이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은 자기를 추구하는 삶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하나님도 율법을 실천하는 자신들을 위해 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인해 가려지고 볼 수 없게 되는 것은 ‘저주 아래 있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도 복도 자신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 아래 있는 인간에게 구원이 당연한 것입니까? 과연 그런 인간에게 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 교도소 안에서 교도소 밖의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교도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를 범한 죄인들이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때문에 교도소 안의 그들은 당연히 좋은 환경에서 좋은 것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저주 아래 있는 죄의 종 된 인간이 구원과 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말한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으로서는 무엇으로도 구원과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해야 옳은 것입니다. 그 어떤 정성과 노력을 보인다 해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 같은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진리로 인해서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고 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죄로부터 자신을 건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을 추구하던 신앙이 그리스도를 추구하게 될 때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자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알고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4. 자유자의 삶
그런데 자유에 대해 잘못 이해하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신자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자유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부르신 후에 무엇인가 할 일을 줘서 그것을 실천했을 때 기뻐하시고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그 자유를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세계는 우리의 정성과 행함과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로 다 이루어진 은혜를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나만의 편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에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했을 때 그 자유는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관계로 드러납니다. 내 이익과 편함을 위해 자유를 이용하지 않고 우리를 자유하게 한 진리를 서로에게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으로 참 자유는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실천하는 것으로 의롭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으로 말씀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율법은 인간의 행위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으로 간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율법에 머물려 하고 또 자신의 행함에 붙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행함을 더 확실한 증거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에 매이고 죄에 매여서 진리로 인한 자유를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행위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자신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다 이루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행한다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 행위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매이지 않은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이러한 자유의 세계로 끌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