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의 온전함
본문 / 히11:39-40
1. 유대 사회에 오심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유대 사회에 오셨습니다. 유대 사회는 믿음으로 유지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는 존재 이유였고 믿음을 삶의 전부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유대 사회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 오신 것은 유대 사회가 추구해 오던 믿음이 믿음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유대 사회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벗어 날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어 잘못된 길을 가는 유대 사회에 전하게 하심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 오심도 같은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어 유대인들의 죄를 드러내신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는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직접 오셔서 그 당시 유대 사회의 거짓된 믿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 사회가 참된 믿음으로 바르게 유지되고 있었다면 말씀이신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유대 사회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한 유대인이 정작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고, 그들이 믿음이라고 자부하던 믿음또한 하나님 보시기에는 믿음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은 세상에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이라고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모습을 알게 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믿는다고 자부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바른 복음이 증거되면 듣는 이들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은 주의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오직 주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고 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21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21:21)라고 하여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누구도 뽕나무나 산에게 그러한 말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말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아예 믿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앞에서는 누구든 ‘믿음이 없다’로 시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나는 믿음이 있다’로 시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의미를 묵살하는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스스로 믿음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만큼은 믿음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증거를 이방인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율법이 자신들에게 있고 그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것에 두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로 규정되었을 뿐입니다.
2. 믿음의 근원과 착각
우리에게 믿음이 없고 믿음을 생산할 수 없다면 믿음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 믿음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또 위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세상이 아니라 골로개서 3장의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는 말씀처럼 위엣 것을 바라며 예수님만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말씀은 믿음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복을 위해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사회의 믿음을 부정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예수님 앞에서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이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고, 우리가 그 믿음을 예수님께 받았고, 우리가 그 믿음의 능력에 붙들려 있다면 그 믿음의 사람은 자기를 지향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생명만을 증거하고 높이는 것에 뜻을 둘 뿐이지 자신이 믿음 좋은 사람으로 높임 받고 또 부각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여부는 바로 이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의 관심은 오직 자신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까지도 자기 믿음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한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백을 했으니 나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착각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믿음은 유대 사회의 믿음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들은 많은 설교 중에 믿음의 부족을 말하면서 부족함을 채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근원을 인간에게 두고 행함으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 나간 둘째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허랑방탕하게 살다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며 잔치를 베풀자 큰 아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28절부터 보면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8-30)라고 합니다.
집 나가 살았던 동생을 맞이하며 살찐 송아지를 잡은 아버지의 환대에 동생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불평을 토로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에 철저하게 따랐던 자신에게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라도 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15:12)라고 합니다.
여기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는 말은 집 나간 동생뿐만 아니라 형에게도 아버지는 분명히 재산을 나눠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형은 자신에게 염소 새끼도 준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앞에서 읽은 29절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15:29)라는 형의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형이 생각하는 아버지는 이런 분이신 것입니다. 무엇이든 아버지의 말씀을 절대 지키며,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면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안 주었다는 것입니다. 형의 이런 생각 속에는 아버지는 그냥 주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일을 한 것에 대한 대가를 주시는 분으로 여기고 있기에 집 나가 방탕하게 살다 온 동생을 환영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는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고 합니다. 아버지가 보기엔 동생은 이미 자신의 것을 다 가지고 나가 써 버렸고 이제 집 안에 있는 것은 형의 몫이기 때문에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일한 것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32절의 말씀처럼 그런 동생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은혜를 누리는 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처음 주의 부름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을 모릅니다. 집 안의 큰 아들과 같은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도 허락하셨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행함을 비교하면서 자기 행함이 타인보다 좀 더 낫다고 생각되면 믿음에 만족하고 안심하지만, 타인보다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행함을 더 강화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에 과연 부족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부족한 믿음을 주시고 또 누구에게는 완성된 믿음을 주신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도 믿는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부족을 말하는 것은 믿음을 받은 이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을 받았다면 그 믿음을 지키고 유지해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큰 착각인 것입니다.
3. 믿음의 완성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11:39)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되는 믿음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물론 히브리서 11장에서 언급된 그들만이 아니라 32절에서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11:32)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부르시고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신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믿음에 의해 믿음의 길로 갔음을 인정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신자들과 다른 것은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약속된 것을 받아야 온전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40절에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11:40)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은 약속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제아무리 믿음의 증거를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더 좋은 것을 받지 못했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온전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을 믿었으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약속된 것을 받은 신자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신자가 분명히 주지해야 할 사실은 믿음의 온전, 즉 믿음의 완성과 충만은 우리의 행함의 열심과 우리의 선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믿음의 완성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즉 믿음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완성된 믿음에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자가 만약에 ‘나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좋은 것, 온전한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믿음의 행위라고 여기는 어떠한 행위가 없음으로 인해 그런 믿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곧 믿음의 주체를 자기 자신에게 두기 때문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믿음에서 떠난 것이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인간의 스스로 믿음을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앙이며 고백인 것입니다.
4. 믿음의 보충
그래서 이런 참된 믿음의 인도함을 받는 신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땅의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땅의 것을 원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있지만 그 또한 배설물에 지나지 않은 것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한 자기 가능성을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3:9-10)는 말을 합니다.
여기 보면 사도 바울은 분명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부족을 말하고 그리고 그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 그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온전하고 더 좋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뜻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부족한 믿음이 아니라 아예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보면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1:6-7)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로 인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고자 기도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앞에서 믿음의 완성은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어떤 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믿음의 길로만 갈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완성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부족함이 없는 완성된 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에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환난이 있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항상 유혹과 시험을 받으며 세상으로 끌려가는 자신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부족하고 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온전히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족한 믿음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함으로 환난 가운데 있는 그들로 하여금 더욱 더 그리스도를 바라고 그리스도가 소망이 되는 믿음의 길로 가도록 돕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 믿음의 보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보충을 약해진 배터리를 충전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온전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완성의 의미 또한 예수님에게만 국한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믿음은 완성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완성된 믿음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채우고 이루어야 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 없는 자신을 주께 부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믿음의 완성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