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불뱀과 예수님
본문 / 요 3: 9-15
1. 지식과 생명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단지 니고데모가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 것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나누었던 것처럼 성령으로 되어지는 일에 대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의 지식이라면 선생이면서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얼마든지 책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지혜인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할지라도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일이며 성령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볼 때 10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니고데모에 대한 단순한 책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겠습니까?
니고데모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 안에서도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권위 있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거듭난다는 성령님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결국 이 말씀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권위 있는 지식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신학박사라고 할지라도 그 지식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일을 깨닫는 깨달음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오직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의 지식은 성령의 일을 깨닫기에는 무용지물이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서 오늘 본문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3:10)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만으로 그가 믿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잘 모르면 믿음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가 성경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서 무조건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목사의 믿음을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경에 대한 지식이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구원이 왜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어질 수 없는가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본문 7절에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고 말씀합니다. 여기 ‘거듭나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듭남이 필요하니까 거듭나기 위해서 힘쓰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원은 인간의 애씀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무능함과 부패성에 대해 인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이 없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놋뱀
오늘 본문 13절부터 보면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3-15)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영생, 즉 구원이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옛날 구약의 사건을 말씀하심으로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라는 말은 민수기 21장에 등장하는 사건을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물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을 죽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불뱀의 고통으로 인해서 모세에게 여호와께 기도하여 불뱀을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애원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물린 자들이 장대에 달린 놋으로 만든 뱀을 봄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쉽게 장대 높이 놋뱀이 달린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릴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것의 의미와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뱀을 들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은 그들의 원망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결과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 죽음에서 구출 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불뱀을 자기들에게서 떠나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보다는 자신들을 죽게 하는 것을 없애 달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청에 대해 하나님은 불뱀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고 있었고 그곳엔 이미 불뱀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이 불뱀으로 인해 그 어떤 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은 불뱀이 많은 광야를 지나면서 불뱀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실 것 먹을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고 있음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불뱀으로부터 노출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뱀을 만들어 달게 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를 살게 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을 때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죽게 했던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단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의 도구였던 뱀까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결국 장대에 달린 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들을 죽게 하는 뱀도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믿는 것이 곧 사는 길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면서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놋뱀도 들리고 예수님도 들렸으니 구약의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버리면 결국 뱀, 즉 성경이 마귀로 상징하는 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상한 결론이 돼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놋뱀=예수님”이라고 해석하면서 단순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라면 구원을 얻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믿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3. 인자의 들림
뱀에 물린 자가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봄으로 살았다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은 땅에서 인간들이 어떤 일을 행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를 바라봄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저주와 심판 모두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신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거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스라엘을 죽게 하는 뱀을 장대에 매단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권세 아래 거하는 것이 곧 생명임을 믿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믿는다는 것은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죄를 해결하심으로서 영생이 주어진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사는 자라면 영생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의 거듭남 역시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늘에 가심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단지 영원히 산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전체를 두고 볼 때 ‘영생’이란 용어는 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같은 의미에서 영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두고 생각할 때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영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을 하늘나라 임금이 내려주는 선물의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지 땅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맺어지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예수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믿음 안에서 이미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자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자에게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무엇인가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을 얻은 자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해 부족함을 느낄 이유가 없고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뭔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영생은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같이 공감하고 이구동성으로 외치고 있는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생이 주어질 만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벗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자들의 소유입니다. 신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힘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기에 힘쓰는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한 힘씀이 아니라 믿음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신앙의 모습이며 거듭난 깨달음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