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본문 / 요 4: 9-10
1. 고백과 착각
누군가가 나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답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상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거나 또는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은 성경적인 차원에서는 모두 맞는 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라고 질문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라는 답을 했습니다. 이 답은 우리에게서도 나올 수 있는 답입니다. 성경을 알고 있는 우리가 생각할 때 전혀 틀린 답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1-32)라고 하여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 가르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게 됩니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8:33)라는 말씀을 하셨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수준의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주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그가 주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들의 입술만의 대답이 아니라 삶에서의 대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신다면 그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으로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고백은 곧 삶과 연결되어지는 것이며 그 고백이 참된 고백이라면 그 고백은 삶에서 열매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백은 우리의 삶으로 일치되어야만 합니다. 만약 삶과 일치되지 못하는 고백이라면 그것은 죽은 고백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쉽게 답하고 또 알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볼 때 자신의 입술로 하는 고백과 삶이 별개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있으며 또 그리스도를 안다고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해서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라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물 좀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그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결국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점을 지적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단지 유대인으로만 봤다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오신 예수님이 누구인 줄 모르고 유대인으로만 보면서 사마리아 사람인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구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전혀 구하지를 않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님에게 구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생수’라고 말씀합니다. 즉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생수를 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임을 알고, 그 선물을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에게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 줄을 모르고 있으며 또 예수님이 선물을 주시는 분임을 모르기 때문에 구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유대인으로만 볼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극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사전에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 상태이기 때문에 단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관계에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소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고 하는 신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면 결국 어떤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생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입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대비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었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더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몰랐던 사람으로 등장을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찾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니고데모에게는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스스로 찾아가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가 누구인 줄 알았으면 구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에게 구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구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철저한 신앙체계를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이미 신앙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해야 할 부족한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눈에 보인 표적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말씀을 하신 것은 니고데모가 갖추고 있는 조건을 가지고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과 같은 철저한 종교적 전통으로 무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여인을 찾아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볼 때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한 조건이 모두 포기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우리 나름대로의 종교적 조건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 수 없습니다. 입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는 고백을 할지는 몰라도 그 삶에서 주님은 결코 그리스도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3. 아는 자의 삶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리가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기뻐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보여질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나옵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니고데모와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어떤 표적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서 내 발로 스스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당신은 유대인이라는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 ‘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데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가 있겠는가?’라는 식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았다면 생수를 구했을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은혜를 주시는 분임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은혜를 구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은 은혜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입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죄를 안다는 것이고 자신의 죄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임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구할 것은 분명해집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시고 용서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외면하거나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은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적인 지식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