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자들
본문 / 요 4:43-54
1. 믿음
신자인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을 보이는 것을 근거해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본문 앞 20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로서의 예배를 눈에 보이는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의 성전을 근거 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로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문제를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방법의 개선과 변화 등을 통해서 좀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겠다는 의도 자체가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근거해서 예배하려고 하는 사마리아 여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말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으로 확인 되어지는 믿음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 자체는 아닙니다.
그런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말한다면, 결국 인간이 바라는 것의 실상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역시 보이지 않고 볼 수 없는 믿음이라면 이 또한 눈으로 보이는 것을 내세워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는 자는 자신이 바라는 것의 실상을 이미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는 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는 바라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발버둥 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실상과 증거인 믿음이 없으니 결국 보이는 것에 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는 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믿음을 방해할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믿음을 도와줄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마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함께 하신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지 보이지 않는 영이신 성령이 보이는 것을 동원해서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어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할 때, 어떻게 보이지 않는 믿음이 실상과 증거가 될 수 있습니까? 실상과 증거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음이 실상이요 증거다’라고만 이야기해 버리면 뭔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신자에게 실상으로 이미 계시 되어진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신자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나타난 것 역시 말씀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바라는 모든 것의 실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믿음이 곧 신자에게는 실상이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4절에 보면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4:44)고 말씀하고 또 48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믿음의 현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서 이틀을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떠나실 때 하신 말씀이 44절의 말씀입니다. 갈릴리로 가시면서 왜 44절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마리아에서 말씀을 증거하신 일이나 갈릴리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왜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선지자를 고향 사람들이 잘 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높임을 받는 것은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높이는 것은 선지자로 증거되어진 말씀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의 권위는 선지자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굴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며 그것이 선지자를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잘 안다면 선지자의 말 자체를 무시하게 됩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계시 되어지는 말씀을 보기보다는 선지자 자체를 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6:1-3)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고향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고는 그 지혜와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에 놀랍니다. 예수님이 평소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말씀과 다른 특별한 것을 가르치신 것도 아닐 것인데 놀랐다는 것은 그래도 말씀을 들을 줄을 안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면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으면 되는 것인데, 고향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에게 가르치는 예수라는 사람이 보잘 것 없는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며, 또 예수님의 형제들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고 현재도 그들과 함께 거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해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침에는 놀랐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 굴복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믿음을 방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겉모습을 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보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겉모습으로 인해 예수님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유대인으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알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스스로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이 오히려 믿음에 장애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믿어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말씀으로 증거되는 참된 실상과 참된 증거를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갈릴리 가나에 오셨을 때 가버나움에 있던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병든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의 죽게 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왕의 신하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말해서 믿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신하를 향해서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왕의 신하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대의 사람들이 바로 믿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설사 표적과 기사를 봤다 하더라도 그들은 표적과 기사에만 매일 뿐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알려 주려고 했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왕의 신하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말씀을 이 신하의 경우에 대비해 볼 때 어떤 이해를 할 수 있습니까? 왕의 신하는 지금 자기 아들을 고쳐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하에게 있어서 바라는 것의 실상은 예수님이 자기 집으로 가셔서 아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하의 집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요4:50)는 말씀만 하십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자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신하와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의 현실은 바로 말씀 자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실상과 증거는 말씀을 믿는 것이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하의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는 예수님이 ‘가라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았다고 말씀하신 그때 이미 아들이 나았다면 현실은 말씀대로 아들이 나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함으로 인해서 이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게 되어진 것 같은데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하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때 낫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신하에게 있어서 현실은 아들이 병이 들어 죽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서 나은 것이 현실입니다. 만약 신하가 말씀을 믿었다면 신하에게 있어서 현실은 아들이 이미 나은 것입니다. 비록 보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들이 나은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지 못하고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믿지를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세대를 책망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요4:50)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하는 아들이 살았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예수님을 믿은 믿음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52절에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요4:52)고 하는 말씀을 보면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길을 떠난 하루 뒤에 종들을 만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하의 집인 가버나움과 예수님이 계시던 갈릴리 가나는 시간상으로 약 4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떠났다면 당일에 집에 도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루를 지체했다는 것은 결국 아들이 나았다는 믿음이 아니었음을 짐작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나을 것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이해해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53절에 보면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요4:53)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들이 나은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므로 50절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자의 현실
오늘날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서 말씀이 무시되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6장에 보면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실상이요 증거라면 신자의 현실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해서는 염려함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합니다. 말씀은 신자에게는 현실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말씀이 신자에게는 현실인 것입니다. 공중의 새들도 들의 꽃들도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신다는 것이 말씀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실상으로 증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그 결과는 말씀을 배척하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증거 되어지는 신자의 모습은 하늘에서 복된 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떤 복을 말씀하셨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참으로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팔 복을 본다면 팔 복의 말씀은 단지 성경책 안의 말씀으로 머물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말씀으로 되어지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 현실을 보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보려고 하십시오. 말씀의 현실은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한다면 예수님에게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말씀은 항상 보는 것을 실상으로 삼고 증거로 삼는 사람들로 인해서 무시되고 배척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