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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빛과 어두움

본문 / 8:12

 

1. 어둠인 세상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12)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말씀이지만 많이 들었다는 것일 뿐 사실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얼마나 예수님의 뜻에 가까이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심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말씀은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해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또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는 말씀과 그리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이 말씀들은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시는 분이라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세상을 비추시고 계신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러한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에 어둠이라면 어둠 속에서는 조그만 빛이라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둠인 세상은 왜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멸망 받을 세상의 빛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라면 당연히 빛을 깨달아야 마땅한데 왜 깨닫지를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명의 빛이란 분명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을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얻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은 왜 스스로를 빛으로 말씀하는지 그리고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얻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간단한 말씀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다닌다고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아마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어두움을 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어두운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둠을 비출 수 있는 빛을 찾고자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볼 수 없게 하고 바른길을 갈 수 없게도 합니다. 이처럼 어두움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어둠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빛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둠에 있으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빛을 필요로 할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해가 져서 오게 되는 자연적인 어두움은 보면서도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에 다니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말씀합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어둠이 자신을 어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빛이 필요 없는 상태로 여기기 때문에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면서도 빛에 관심을 두지도 않고 빛으로 볼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된 우리는 어떻습니까? 분명 세상은 어두움인데 어둠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맞지 않고 불편한 것이 있습니까? 아니면 전혀 불편한 것이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어둠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필히 우리는 빛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강자가 우대받는 곳입니다. 반면에 약자는 피 흘림을 당할 수밖에 없고 손해를 본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둠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곧 어둠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고 그 삶의 방식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러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 필요로 하고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런 세상에서 힘이라고 하는 것들만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어둠으로 본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곧 빛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어둠인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자가 우대받는 세상에 하나님이시면서 약자로 오신 분이시고,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리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상에서 예수님을 빛이라 말씀하신 의미인 것입니다.

 

2. 생명의 빛을 얻음

불의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불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의를 찾지 않게 됩니다. 의가 필요하지 않기에 의를 찾지 않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에 있으면서도 어둠을 깨닫지 못하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고 필요하지 않기에 찾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빛을 비춰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빛으로 알아줘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작 세상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분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데 홀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외쳐본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것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어둠에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약자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는 자로 오심으로서 강자로 살고 자기 유익을 위해 타인을 피 흘리게 하는 이것이 곧 어둠인 것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을 어둠으로 보며 또 어둠으로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우리에게는 세상은 불편한 곳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세상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내 고향처럼 내 집처럼 불편함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나라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 나라는 강자가 살아남는 세상에 지는 자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는 자로 사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이 됩니다. 이것이 어둠을 어둠으로 보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시면서 세상이 어두움으로 보여지고 예수님이 빛으로 깨달아진다면 우리는 바른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답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산다는 것은 모든 인생에서의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세상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답을 찾는다면 그 답은 언제나 강자 될 수 있고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답을 얻는다면 분명 세상의 답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답을 따라가는 것이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 된 세상을 피해서 어디 멀리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지만 모든 답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얻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어둠에 다니지 않음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다들 도망을 쳐버립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죄를 알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죄를 알았으면서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삶의 방식, 즉 어둠의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포기하겠음을 뜻합니다. 세상이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어둠을 다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뜻까지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주어지면 그것으로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율법을 남을 죽이고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었는데 거룩한 것이 죄인 된 인간에게 주어질 때 인간은 거룩한 것을 죄의 도구로 사용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에 있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을 때 진리를 가지고 남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정작 진리는 내 자신이 어둠이고 죄인임을 선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선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그 선언을 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인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가졌기에 정당하고 옳다고 여기고 그 진리를 도구 삼아 다른 이를 비판해 버립니다. 때문에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쳐 버릴 뿐,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 가는 그리스도에게로는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정당하고 옳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갑니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 되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앞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이 어둠임을 깨달은 사람은 나에게 진리가 주어지면 나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 밖에 안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곧 내 인생의 빛이시다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얻는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모든 인생의 답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강자되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며 오직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여러분이 바로 생명의 빛을 얻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으십시오. 이것이 어두움을 다니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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