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나님과 죄
본문 / 롬 6: 1- 4
1. 죄와 인간
신자들이 죄와 믿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려면 죄에 대하여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문제는 많은 오해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죄와 믿음의 관계에서 자칫 곡해하기 쉬운 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은 죄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생기는 생각이 신자는 죄로 말미암아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해도 믿음의 문제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말이 듣기에는 그러듯 하지만 실상은 죄에 대한 생각을 둔감하게 하는 것이며 십자가로 이루어진 용서의 은총을 말 그대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기능으로 전락시키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6:1)는 말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죄와 은혜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함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숙명론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으며, 죄를 이길 수 없기에 죽는 순간까지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죄가 단지 행위적인 면만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죄라고 여기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죄를 안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의 죄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닌 인간 안의 내면적인 어떤 힘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안에 우리가 원하든 또는 원하지 않든 항상 솟구쳐 나오는 미움 시기 질투 같은 것들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것들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속을 아시고 보시는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1서에도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1서 3:15)라고 하며 또한 마태복음 5장에도 보면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만 미워해도 이미 살인자와 같고 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자와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살인과 간음은 우리의 힘으로 조절과 절제가 가능하다고 해도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미움과 음욕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 앞에 그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숙명론으로 받아들이며 죄를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죄를 용서하신 은혜만 고백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울의 지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용서의 은혜를 받았다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죄를 이겨나가야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말이겠느냐고 한다면 그것 또한 죄에 대한 곡해일 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죄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자는 말은 결국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부터 보면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2-4)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서 더 살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임을 말합니다. 세례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부터 죄를 짓지 않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죄를 짓더라도 그 빈도가 세례받기 전보다 더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까? 죄의 빈도가 줄었을 리가 없지만 설령 죄의 빈도가 줄었다 할지라도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라고 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하나라도 범했다면 전부를 범한 것으로 말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례의 의미인 예수와 합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또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 것입니까? 예수와 합하여 죽은 것이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2.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6절부터 보면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6:6-7)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의 죽음을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여기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다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죄가 명령하는 대로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죄를 따르지 않고 범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에 따르면 죽음은 죄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뜻합니다. 죽었으니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말씀드린 것처럼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이고 그것은 죄의 삯인 사망에서 벗어났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누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 즉 사망에서의 해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죄에 대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부터 보면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0-11)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죽음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새 생명의 사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하여 죽어서 죄로부터의 자유, 즉 사망에서의 해방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 즉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례는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자리에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예수와 함께 살아남을 믿게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없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합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신자가 지향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닌 생명의 나라라는 뜻이고 따라서 우리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죄에 거하는 것을 지향하거나 당연히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서 예수와 함께 나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그 은혜의 세계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는 우리의 노력이나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기적의 사건에 마음을 두며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신자를 애통으로 끌어갑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며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로 인해 회개하며 애통하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 안에서 성취된 새 생명의 사건을 보게 되고, 기쁨과 감사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인이라는 것으로 죄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머문다면 그는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3. 구원 이후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은 은혜받은 이후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 회개한 이후를 말하며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 합당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회개를 했다면 역시 그에 합당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은혜를 받았어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화로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은혜 아래 있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면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나 같은 자에게 구원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우리의 의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서 깨닫게 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그 기쁨에 매임으로 자연히 나타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알았다면 은혜받음에 대해 보답하기 위해 변화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허락하신 은혜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낮아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본다면 자신의 노력이나 자기 믿음으로 행한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변화이고 은혜에 합당한 삶입니다.
이 내용들이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실천적 행함에서 믿음을 확인하고 만족하고자 하는 것은 실재하는 행함이 있어야 추상이 아닌 사실적 믿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일 또는 도덕과 연결된 실천의 행함이 아니라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행함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새생명을 얻기 전의 우리는 오직 이 땅의 것만을 위해 그리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전부였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새생명을 얻은 자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신자가 지향하는 것은 그 전에 살았던 이 세상이 아닌 생명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를 그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죄에 거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많이 했건 적게 했건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고 생명에 있게 한 것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모두가 죄가운데서 죽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1-12)고 말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으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아도 은혜를 말하긴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은혜는 온통 자기만족을 위하고 자기만족에서 표출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써 알게 되는 은혜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고 그로 인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다시 사심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채울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단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에서 크고 놀라우신 긍휼과 사랑을 알고 은혜로 주신 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로 성취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1. 우리가 생각하는 죄와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어떻게 다릅니까?
2.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3.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대한 우리와 바울의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4. 주 안에서 받은 세례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게 했다고 합니까?
5.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신자가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며 또 그런 행함은 신자를 어떻게 살게 한다고 합니까?
6.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요구하지 않는 것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만들어내는 오해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구원 받은 신자에게 있어 구원 이후에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변화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에서 믿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1. 새 생명을 얻기 전의 우리의 삶과 새 생명을 얻은 후의 신자의 삶의 변화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2. 하나님의 영으로 아는 은혜와 그렇지 않은 은혜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