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에게서’
본문 / 마 1: 7-17
1. 십자가
우리는 흔히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라는 것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하고 죽인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3)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은혜로 시작하였으나 그 끝은 자기의 의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기뻐하실만한 행동을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자기의 의가 그 속에 살아 있고 그렇게 자기의 의를 생산함으로써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는 발상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는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인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의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곧 그리스도의 오심이고 죽으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간은 인간의 의를 절대로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동안 의로운 것으로 여기고 알았던 모든 것이 의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었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말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셨다는 것에서 큰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를 보시고 인간의 그 의를 보고 복 주시고 구원하는 방식이었다면 그 누구에게도 생명은 없고 오직 영원한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의로 보실만한 그 어떤 의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이루심으로 세상에 세워진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인하게 하며 오직 예수님의 행위만을 유일한 의로우심으로 믿으며 주만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와의 만남인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의 족보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족보의 중심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 안에서의 인간은 어떤 존재들이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족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 안에 있던 인간들은 하나같이 온전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실만한 가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원할만한 가치 있는 인간만 고르겠다고 하셨다면 하나님의 구원에 해당 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8:21)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악함을 보시고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는 것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말은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하지 않은 자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구원하실만한 가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악하다는 것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신다면 마지막 때 주어질 심판의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습니다. 왜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주안에서의 자신의 악함을, 즉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안다면 자신의 모든 악함을 대신해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자신을 심판에서 건지는 능력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악함을 보지 않고 인간의 행위를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 행위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는 주의 의로우심 밖에 있는 것이기에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내용을 족보에 담아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2. ‘에게서’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1:17)고 말합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계보를 셋으로 나누면서 각기 열네 대로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가 말하는 열네 대라는 계보는 실제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 일단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까지 열네 대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열네 대가 아닙니다.
8절에 보면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요람은 아하시야를 낳고 아하시야는 아달랴를 낳고 아달랴는 요아스를 낳고 요아스는 아마샤를 낳고 아마샤 웃시야’를 낳은 것입니다. 또 11절에서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이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부터의 계보 역시 열네 대가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족보와 비교하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몇 사람을 제외하면서까지 의도적으로 열네 대로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족보 이야기에서 무척 어려운 내용입니다. 다윗이 족보를 열네 대로 맞춘 이유를 확실하게 알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말하기는 하지만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견해는 ‘다윗’이란 히브리 알파벳의 자모의 수가가 도합 14(다렐이4, 와우가 6, 다렐이 4)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열네 대로 맞추고 있는 것은 각 시대의 중심에 다윗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마태가 말하는 열네 대가 과연 다윗이라는 히브리말의 알파벳 숫자의 합을 의미하는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각 시대의 중심에 다윗이 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야 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17절에서 말하는 세 시대의 구분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에서는 다윗은 없지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계보의 중심에는 다윗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의 오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계보이고 열네 대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구분하고 있는 세 시대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 시대마다 ‘에게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계보에는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까지의 계보에는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말이 등장하고, 바벨론으로 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의 계보에는 ‘마리아에게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에게서’라는 말이 족보에서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원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도 죄에 대해서는 온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잡혀갈 때까지의 왕들을 보십시오. 온전한 왕이라고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므낫세 같은 사람은 온갖 우상은 다 섬긴 사람이고 아하스나 다른 왕들도 다를 바가 없는 왕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을 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족보를 보면서 ‘므낫세 같은 악한 왕도 구원 받습니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의 족보는 구원의 여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즉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족보가 16절의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1:16 상)로 끝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인들의 족보로 끝나버릴 것이고 결국 각 시대를 흘러오면서 끊이지 않던 죄로 인해 멸망을 받을 족보가 될 것입니다. 인간이 누가 누구를 낳았던 결국 죄인이 죄인을 낳은 것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 말씀 뒤에 이어진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16 하)고 하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족보는 죄인의 족보일 뿐이고 죄로 인해 멸망을 받아야 할 족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인의 족보에 예수님을 등장시키십니다. 이것이 언약의 성취인 것입니다. 죄인의 족보에 예수님이 등장하심으로 인해서 영원한 사망이 생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성취가 곧 하나님의 뜻이며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 뜻과 열심을 보여주는 것이 ‘에게서’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에서 다말과 라합과 룻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족보는 다윗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혈통은 계속 이어졌을 것입니다. 다말이 유다와 동침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유다가 다른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혈통이 다윗이라는 왕으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혈통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생명과도 상관없는 멸망의 족보로 끝날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세대에 등장하는 ‘에게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관여하시고 주장하고 계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등장도 인간에게는 희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다윗 역시 이스라엘을 구원으로 인도할 온전한 왕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말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라는 말은 다윗의 모든 죄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다윗 역시 우리와 똑같이 희망이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다윗의 희망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사랑은 다윗에게 희생당한 우리야와 같은 그리스도의 등장으로 성취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죄로 인해서 분단되고 멸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영원한 왕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3. 하나님으로
이 족보 이야기가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죽어야 할 인간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이 능력에만 마음을 둘 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부인하게 하는 것이고 죽이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내 것이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고 또 살 자격이 없는 자이고 지금 당장 죽어도 마땅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 고백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무엇이 인간을 이러한 고백으로 끌어오는 힘이 있겠습니까? 다만 십자가만이 그러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부인되어져야만 합니다. 열네 대, 열네 대, 열네 대의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언약이 중심이 되고 또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능력에 이끌려 온 세대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이루시는 능력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신자는 두려울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계보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 것처럼 그래서 ‘에게서’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신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완벽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족보는 어두움과 죽음뿐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한 왕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만이 능력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능력 앞에 무릎을 꿇고 참된 신앙의 고백으로 살아가며 또 그 능력으로 내가 아닌 그리스도만 자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간의 의를 내어놓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마태복음 1장의 족보의 중심은 무엇이라고 하며 또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 말씀합니까?
4.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이며 왜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5. 마태가 족보를 세 시대로 구분하고 또 그것을 일부러 열네 대로 맞추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예수 그리스도’에게 까지 연결되지 않은 족보라면 마태복음의 족보는 무슨 족보이며 왜 그런 것입니까?
7. 족보에 있는 ‘에게서’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8. 결국 마태복음 1장에서 우리에게 말해 주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우리가 만난 십자가의 능력과 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오늘 말씀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한다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