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월 15일 / 마태복음 4. (마 1:18-21)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

by 관리자 posted Dec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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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

본문 / 1:18-21

 

1. 가치관

세상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상은 사람과 사람을 구분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 돈 없는 사람, 학벌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이런 식으로 세상의 가치관이 기준 되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으로 구분되어 각기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둔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세상에서 대접받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어릴 때부터 외국어를 가르치고 수학을 가르치면서 공부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인 것보다는 세상에서 더 대접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상은 사람은 다 똑같다는 말은 하지만 그것은 다만 고상한 척하는 말에 불과할 뿐 세상은 사람을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모이면 그런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자로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는 우리 역시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이 세상이라는 것이 늘 발각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사람을 세상과 같이 똑같은 사람으로 보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에 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천국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이 없다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들을 모두가 위장된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자식이 장차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해 주기를 원하십니까? 이러한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족보를 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사람들의 삶은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부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족보는 그들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가난했는지 부자였는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왕이었다는 것도 언급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이름만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항상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돈이 없다는 것으로 낙심하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으로 실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고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하찮게 취급한다고 해도 내게는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내 속에 확고하게 세워진다면 그때부터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 됨을 소원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소중한 그 하나가 우리의 심령에 확고하게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로 난 자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18 )고 말한 다음에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18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어떻게 나셨는가를 밝히는 의미의 말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 앞에, 16절까지 등장하는 사람의 태어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구분의 의미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2절부터 16절까지 등장하는 족보를 보면 모두 사람이 사람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태어남은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사람이 또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장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아래 죽음을 안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저주를 안고 태어나는 단지 육체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간의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결국 첫 사람 아담부터 이어져 온 죽음이라는 저주에 붙들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역사는 계속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죽음이라는 저주로 이어지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 속에 하나님은 저주에서 벗어날 길을 계획하셨고 그 계획을 약속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에 나타내셨으며 그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 세상에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기독교를 신비화시키거나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사람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사람으로부터 난 사람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난 전혀 다른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8:5-6)고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자는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낳은 사람, 즉 육신이 낳은 육신은 육신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영의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작정 영의 생각을 합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영의 사람이라면 자연히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영의 생각을 하는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요한복음 1장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3)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새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천국은 이처럼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서 난 영의 사람만을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에서 난 육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나셨다는 것이 육으로 난 우리의 새로운 태어남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 앞에서 사람이 낳은 사람으로 즉 육체로 존재하면서 어떤 성공을 이루고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으로부터는 환호를 받고 그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영원히 사망에 처할 육의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자는 이것을 놓치고 살면 안 됩니다. 이것을 놓치기 때문에 세상처럼 세상에서 육신의 이름이 높임 받기 위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해서 실망과 낙심과 함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1:21)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성적으로 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이고, 신자는 이 능력에 의해서 죄에서 건짐받고 죄 없는 자로 여김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에게 예수님은 소중하고 가장 존귀한 분일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의 이름이야말로 신자가 영원히 높여야 할 이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이름 다시 말해 우리 육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야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든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 분, 그 일에 순종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는 길을 거부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존귀한 분으로 여긴다면 진심으로 이러한 신자로 존재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기댈 이유가 없는 것은 부모나, 남편과 아내, 자식, 형제, 친구 심지어 자신마저도 자기 속 심령 깊숙한 곳의 갈급함과 공허함을 메워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훈련과 노력으로도 인간 속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탐욕과 죄성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라는 존재 전체가 구제 불능의 뒤틀려진 상태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를 죄에서 건져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을 뿐이고, 그러한 나 같은 자를 부르셔서 그 능력 아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이 아닌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말씀처럼 육으로 난 육신은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이 육신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새롭게 난 자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라면 이 소망에 맞는 기쁨과 복을 세상에서 누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이 육신을 내어놓고 자랑하고 경쟁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자답게 당당한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 영재이고, 내 자식이 홀로 바보라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이것이야말로 그 속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예수님이 능력자로 계신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가 달리 구하고 소원할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가장 존귀한 것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시시하게 생각하지만 죄에 갇히고 사망에 처한 우리 자신의 본질을 바라보는 신자에게는 누가 뭐래도 가장 존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이러한 선물이 주어져 있는데 오히려 세상의 것이 시시하게 여겨져야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령으로 나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영으로 새롭게 나게 하셔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신자라면 예수님이 베푸신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죽으심도, 세상으로부터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고난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도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는 세상의 무엇보다 존귀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소망하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으로 새롭게 난 자는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능력은 세상에서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망에 처한 우리는 생명에 있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능력을 믿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성령으로 오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의 낮아짐도 또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당당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는 신자다운 것이며 또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신으로 난 자가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난다는 것은 기적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기적의 사람답게 참된 기적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영의 사람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교회가 사람을 평등하게 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2. 신자인 우리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 합니까?

 

4. 사람의 태어남에 있어 벗어날 수 없는 두 가지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예수님이 사람이 아닌 성령으로 낳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라 합니까?

 

6.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7.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인간 스스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육이 아닌 영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삶을 산다고 합니까?

 

10.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라고 합니까?

 

11.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는 신자다운 신자의 삶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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