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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본문 / 3: 1- 4

 

1. 이상한 기독교

하나님 보시기에 오늘날의 기독교의 수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상하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상하다고 하는 말이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지금의 기독교는 아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솔직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를 이상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물들어진 복음을 자신의 육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취하는 태도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희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얻고 아니면 고상한 취미 생활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잘 벌고 건강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돈 잘 벌고 건강하게 살면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그리고 그 만족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 이유에 그러한 목적이 담겨 있다면 그가 예수를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일석이조, 즉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도 가고 또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싶은 꿈을 꾸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결과만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도 잃고 육신의 만족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주위를 둘러보면 사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아도 돈 잘 벌고 건강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오히려 열심을 다해 믿음 생활을 했는데도 망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에도 보면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1-3)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절부터는 그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그리고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렇게 고민 가운데 살다가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73:17)라고 고백하며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쓴 저자는 마지막에 이런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26절부터 보면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73:26-28)고 합니다.

이 시편 73편은 신자들의 고민이고 고백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또 그렇지 못한 현실 가운데서 고민하며 살다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서는 그날에 비로소 알게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복이며 또 하나님이 주시려 하고 알게 하시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몸이 잠시 머물러 있는 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몸이 영원히 거할 영원한 생명에 세계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육신의 생존에 보탬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이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을 어리석게 다루고 있는 이상한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떻습니까? 대개는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구원을 이유로 예수님을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찾으면서 점차 보게 되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여야만 합니다. 즉 나의 구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의 피가 보여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무릎을 꿇게 되고 나 같은 자가 구원을 받겠다고 예수님을 찾은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도 역시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과 목적을 가지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그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새로운 세계도 보지 못한 채 다만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자기 존재에만 마음을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선지자 세례 요한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 앞서서 세례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이 요한이 등장하여 외친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였습니다. 그런데 대개 이 말을 회개해야 천국 간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해 또한 자기 구원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회개해서 천국가라는 의도로 그런 외침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예언된 사역이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에 보면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5-6)고 말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는 것은, 실제로 구약에 활동했던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신다는 뜻이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직무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바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주께로 돌이키기 위해 온 마지막 선지자이며 또한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말하는 회개는 단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차원의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천국은 단지 살기 좋은 곳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뜻함으로써 기존의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계가 주님과 함께 왔으니 모든 마음을 주님에게 돌이키라는 의미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외침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3)고 말합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서 40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에 보면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40:3-8)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가 있게 하실 것인데, 그가 할 일은 세상에 치우쳐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며 마르고 시들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선지자로 온 세례 요한은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니 그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신 주께로 마음을 돌이킬 것을 촉구하는 일을 위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세우신 이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만큼 신앙적으로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써 모든 관심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번성에 두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는 마음이 멀어짐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은 선지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경고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기 위해 일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의 등장 역시 심상치가 않습니다. 선지자인 세례 요한이 등장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엉망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말하는 그 때에라는 말도 이런 의미로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이스라엘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써 그 때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가 등장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400년간 말씀이 끊겼습니다. 선지자의 등장은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 또한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이스라엘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밖에 없었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여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늘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의미로 들려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세우신 이유입니다.

 

3. 광야의 선지자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4)고 말합니다. 요한이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산 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기거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모습은 분명 도시에서의 생활 모습은 아닙니다. 이처럼 요한은 광야에서 기거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기거하며 외친 것은 청렴결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곧 애굽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던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나와야 함을 외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두고 있는 그런 상태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온전히 애굽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출애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삽니까?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세계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애굽을 향해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확한 실상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비록 몸은 교회에 있고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듣고 있지만, 세상을 향한 갈망은 여전히 우리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에게 선지자로 온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깊은 찔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찔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영원한 참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세계로 마음이 돌이킴 받을 수 있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그 나라로 향하실 것임을 믿으며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4. 그의 첩경을 평탄케

오늘 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이사야서 40장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40장에 보면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40:3-5)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평탄케 한다는 말의 의미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고,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낮은 곳은 돋우어지고 높은 곳은 낮아짐으로써 평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평평하게 함으로써 어려움이 없는 편안한 길이 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암시합니다.

세상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높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해서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낮은 자리를 벗어나 높은 자리에 위치하려고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절망하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도 세상의 기준에 서서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열망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대로 이상한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주님의 세계는 그러한 높고 낮음이 없는 세계임을 외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높고 낮음이 있고 그래서 애굽이지만, 광야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는 평평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있다면 모두가 죄인일 뿐이고 죄인된 나를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 됩니다. 신자는 바로 세례 요한이 평탄케 한 주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씀 안에서 높고 낮음이 있는 세상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은 낮아지고 낮은 곳은 돋우어진 평탄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의 것으로 높고 낮음을 경쟁하고 싸우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에게 높고 낮음의 문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타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말로 평탄케 하신 주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악한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높고 낮아짐의 문제는 결국 마르고 시들 수밖에 없는 한계적인 육신을 가지고 영원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헛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우리 마음을 두고 회개하며 평탄한 주의 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짐으로써 평탄한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말씁 복습하기)
 

1. 오늘날의 기독교를 이상하다고 표현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이며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무엇을 본다고 말씀합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4. 말라기의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외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6.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세우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세워지고 또 하나님이 선지자를 이스라엘에 보내시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세례 요한이 등장할 당신의 이스라엘의 형편은 어떠했다고 말씀합니까?

 

9. 오늘 본문 4절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10.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출애굽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세례 요한이 외치는 주님의 세계는 세상과 어떻게 다릅니까?

 

12.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오늘날 우리가 회개해야할 죄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 2월 2일 / 마태복음 10. (마3:5-9) 세례 요한의 세례

  2. 1월 26일 / 마태복음 9. (마 3:1-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new

  3. 1월 19일 / 요한복음 65. (요 11:7-10) 낮에 다니는 빛을 보는 사람

  4. 1월 19일 / 마태복음 8. (마 3:1) 성경에 없는 예수님의 30년

  5. 1월 12일 / 요한복음 64. (요 11:1-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6. 1월 12일 / 마태복음7. (마 2:19-23) 나사렛 사람 예수

  7. 1월 5일 / 요한복음 63. (요 10:30-39) 예수의 죄

  8. 1월 5일 / 신년감사예배 / (요 6: 47-51) 떡(생존)과 말씀(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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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관리자 : 예원교회 방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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