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2월 2일 / 마태복음 10. (마3:5-9) 세례 요한의 세례

by 관리자 posted Feb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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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례 요한의 세례

본문 / 3: 5- 9

 

1. 자기 구원

오늘날의 사회에는 여러 종교가 있는데 그 종교들이 지향하는 바는 자기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구원이란 이생에서는 세상의 복과 죽은 이후의 내세에서는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 양쪽의 모든 세계에서 자기 구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하나씩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연히 자신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곧 나를 위한 기독교’,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예수님’,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봉사를 낳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신을 찾는다면 모든 것을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활용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든 혹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빠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런 현상을 지난주에 이상한 기독교라는 용어로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되는 진리를 겨우 자기 구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거는 것처럼 진리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한 천박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회개와 세례가 등장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고 외치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에게 나아온 무리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은 주로 이런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이 하나님보다는 자기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속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받아 누릴 뿐이고 그 은혜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뿐이지 자기 구원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힘을 써야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인간은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소유하려고 애를 써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결국 생명에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절대 생명의 세계에 속한 것을 인간적 노력을 통하여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듣기 때문에 마치 생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속한 생명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생명을 땅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듯 생명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절대자이시고 창조주이시며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때가 이를 때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영광이 무엇인지, 거룩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이르기 전인, 지금의 이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생명을 우리가 성취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의 영이 우리의 안에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활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절대 세계에 속한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행함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회개도 세례도 그리고 종교적인 모든 행위를 자기 구원과 연관하여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만 자기 구원에 집중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헛된 생각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2. 회개와 세례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회개는 돌이킴을 뜻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행한 잘못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면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세상이 전부이던 그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게 되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사람이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잘못을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면 누군가가 회개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로 돌이킴을 받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것을 사람이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뉘우침이나 반성의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에 8절에서 말하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잘못된 행위를 반복하지 않고 도덕적 선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해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수십 년전에 배가 고파서 빵집에서 빵 하나를 몰래 훔쳐 먹었는데 그것을 회개하고 빵값을 갚는 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구절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성이나 뉘우침은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반성을 하고 뉘우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도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기까지 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룟 유다의 그러한 행동을 회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가룟 유다가 자기 행동에 대해 뉘우치고 반성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나라로 그 마음이 돌이킴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기 죄를 통해서 죄에 갇힌 인간의 비참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반성과 뉘우침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다시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고 선행을 행하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죄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결국 인간의 비참함을 보기는커녕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말하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죄로 인한 인간의 비참함과 절망적인 상태를 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것만 바라볼 뿐이지 세상의 것으로 가려져 있는 인간의 내면과 그 실체에 대해서는 소경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실 주의 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해 절실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행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님의 나라로 돌이킴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신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 또한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부터 보면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3:5-6)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으면 그것이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가 살아나고 아브라함, 모세까지 살아나서 합동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해도 그 세례에 구원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가 세례를 준다고 해도 인간은 결국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11절에서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3:11)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고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의 세례가 우리를 구원의 능력 안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까? 구원의 능력도 될 수 없고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세례만이 우리를 구원의 능력 안에 있게 한다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만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어서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았기에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미가 세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에는 지금 너희가 가는 길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는 길이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고난이 기다리고 고통과 손해를 보게 되는 결과가 있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이니 그 길로만 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달라진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달라졌는가? 달라진 마음으로 사는가?’가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3. 독사의 자식들아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요단강으로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옵니다. 그것을 본 세례 요한은 7절부터 보면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3:7-9)고 독설을 퍼붓습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것은 너희의 아비는 뱀, 즉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요한에게 이러한 말을 듣는 것입니까? 혹 세례 요한의 지나친 언사는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동일한 말을 하셨음을 생각해 본다면 적어도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일치된 뜻 안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독사의 자식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사단의 자식이라고 불릴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실천하는 일에 힘을 썼기 때문에 외적으로는 완벽해지기 위해 힘을 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성을 비롯하여 지식이나 종교적인 위치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독사의 자식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확보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이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자신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돌이킴을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부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강한 자기 확신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자신들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하나님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확신, 자기 생각에 붙들리게 하고 결국 고정관념이라는 것으로 인해 참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독자의 자식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를 보면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 속은 자기 확신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게 하고 자기를 믿게 합니다. 자신이 쌓은 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다는 자기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십자가 앞에 나온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생각과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쌓으신 의를 바라보며 그 의가 구원의 능력임을 믿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감추고 치장하는 용도로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감추고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말씀을 들은 신자는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는 그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씀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남을 경험하면서 죄를 자복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이 땅에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것과 그 내용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의 생명이 가치와 비밀은 언제 알게 되며 또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회개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신자가 자기 죄를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한다고 하며 또 그것을 보지 못했을 때 드러나는 착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예수님의 세례만이 구원의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독사의 자식으로 불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오늘날 사탄은 신자들에게 어떻게 유혹하며 일한다고 합니까?

 

8. 신자가 맺어야 할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용하였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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