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월 11일 / 마태복음 23.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

by 관리자 posted May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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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음이 청결한 자

본문 / 5: 8

 

1.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세상은 복을 이생에서의 것과 내세에서의 것으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즉 이생에서의 복이 따로 있고, 내세에서의 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생에서의 복은 자기 확대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확대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높아지고 굳건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다. 내세에서의 복은 물론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천국에서조차 큰 상을 받아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복을 주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유치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온통 자신에게 집중되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생명은 자연히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생명의 문제는 현재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존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생명은 생존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때문에 생명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면서도 진리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복음만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도움이 되는 예수를 듣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진리로 알지 못하고 진리가 아닌 것에 마음을 뺏긴 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세상이 보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떻게 보입니까? 외제차를 타고 호화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외국 여행을 하면서 돈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으로 보입니까? 만약 우리의 눈에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상, 즉 예수님이 오셔서 만드신 새로운 세상은 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된 현실이고 믿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신자의 눈에는 보이는 것 중에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원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 세상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때가 이르면 보이는 세상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보이는 세상에만 마음을 두고 살았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가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준비해 놓은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4-25)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세상에서의 생존에 집중되어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2.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 밖에 볼 줄 모르는 우리에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우리는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누구라도 난 하나님을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분으로 여기고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신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이 곧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까? 청결이라는 말은 누구나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청결한 마음은 곧 더럽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해할 것이고, 그것은 곧 속에 악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항상 선하고 착한 생각만 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청결에 대한 세상의 이해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이해를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청결을 이루기 위해서 악한 마음은 버리고 항상 선하고 착한 마음으로 살려고 힘쓰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타당성이 있으려면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어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7:19)는 탄식을 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선을 원했지만 악을 행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앞에 말씀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7:18 )고 하는 말씀과 뒤에 말씀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7:20)는 말씀을 보면 모든 인간의 속에는 죄가 거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에 의해서 악한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악을 행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죄를 인간이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죄를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면 인간은 죄를 정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입니다.

사람이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악한 생각입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음의 청결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무능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어디로 튈지 본인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라고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한다고 해도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듣거나,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화가 치솟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을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움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죄가 그 속에 있다는 분명한 증거인데,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인간이 자신에게서 악한 생각을 몰아내고 선하고 착한 생각만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청결한 마음은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더럽지 않고 깨끗한 마음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청결을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는 의미의 ‘clean’(크린)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순수하고 섞이지 않은 상태의 뜻으로 말하는 ‘pure’(퓨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청결은 악한 생각을 하는가 착한 생각을 하는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순수하고 섞이지 않는 마음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마음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가득한 것이 마음의 청결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악한 생각을 제하고 착하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마음은 카멜레온처럼 상황과 사람에 따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처럼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의 마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서 말씀하고 있는 순수하고 섞이지 않은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마음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3. 오직 하나의 마음이란

야고보서 1장에 보면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1:6-8)라고 말씀을 합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두 마음을 품음으로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즉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감으로 인해 모든 일이 더러워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두 마음을 의심이 함께 하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결국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착한 생각과 함께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이 들어감으로써 두 마음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의심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고 혹시 하나님이 응답해주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주어지는 어떤 상황에 의해서 그 마음 또한 흔들리고 요동하는 상태가 곧 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복종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고통이라고 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멸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고통의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요동함이 없이 굳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심이 없는 하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생명으로 인도하심을 믿는 그 마음이 곧 청결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청결하지 못하고 더러운 마음은 세상이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힘이 되고 돈이 있는 것이 곧 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사건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고 하면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우리에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본다는 것

그렇기에 신자인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입니다. 그 어떤 일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벌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삶은 생명과 연관되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불행이고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되면 우리를 생명에 인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천국 백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신자의 어떤 특별하고 신비스러운 체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눈이 새롭게 뜨이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진 것 전부를 다 동원하여 성공을 기대하고 새롭게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러한 길로 인도하시는가?”라고 잠시 멈추어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준비 부족이나 운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인생을 재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간혹 일이 잘되었던 것도 자신이 준비를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운이 좋았기 때문도 아니었음을 실패를 통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미리 정해진 것 같은 일정한 흐름에 따라 한쪽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 되어진 모든 일들에 간섭하고 계셨고 또 실제로 당신을 보이셨는데 자기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다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살아왔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살리는 일에 힘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거의 모든 경우에 신앙의 삶을 산다고 하는 우리도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세상에서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에 몰두하면서 겉으로는 기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다는 말씀은 단지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차원에서만 받아들일 뿐 실제적인 삶에서는 철저하게 자기를 확대시키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자기를 확대시킴으로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자기 확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 실망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또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청결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계획과 뜻을 가지시고 세상을 다스리시고 자기 백성을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확신하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이 하늘의 생명을 향해 인도되고 있음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매일의 허락된 여정의 삶 가운데서 이런 하나님을 인도함을 누리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면서도 진리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예수님이 오셔서 만드신 새로운 세상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고 합니까?

 

3. 이 땅을 살아가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청결에 대한 세상의 이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세상이 이해하는 청결의 상태를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성경이 말씀하는 청결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7. 야고보서의 저자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어떤 상태이며 또 반대로 하나의 마음을 품은 자로 사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8. 마음이 청결하지 못한 자는 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9.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말씀의 의미는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10.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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