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화평케 하는 자
본문 / 마 5: 9
1. 다른 화평
사람들은 오늘 본문 말씀인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라는 말씀을 근거로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의 화평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은 세상의 화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화평, 즉 평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든 사람이 열망하고 꿈꿔왔던 이상세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계도 너나 할 것 없이 화평을 말하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종교의 할 일인 것처럼 강조하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회를 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세계 평화이고 남북통일인 것입니다. 세계 평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세계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세계 평화를 말하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교회가 할 일인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을 세계 평화를 위해 오신 분으로 오해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구절로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 2장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가 외친 이 말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셨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사가 외친 평화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 즉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들에게만 이루어질 평화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세상의 평화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에 감동을 받아 전쟁이 멈추고, 가정이나 개인 간의 불화와 다툼이 사라지는 그러한 모습은 성경에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평화의 사역이 실패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애당초 세상의 평화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오히려 분쟁을 조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 즉 전쟁을 주려고 왔다고 하시니 과연 그런 예수님을 세상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평화는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평화는 세상이 생각하는 평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이나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인간관계가 나누어지게 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세상에는 예수께 속한 자와 세상에 속한 자의 인간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서로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영과 육으로 나눠진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전쟁이기에 검을 주러 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는 세상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세상의 평화를 예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을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화평
신자는 세상과는 조화될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고방식은 오직 이 세상만을 추구하는 것인데 신자는 세상이 아니라 하늘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세상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교회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신자의 존재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스도가 주신 화평입니까? 먼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3-16)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이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들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과 화목 되지 못하고 원수의 관계에 있던 인간의 참담한 실체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인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 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화평입니다.
예수님의 화평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불만과 원망으로만 반응합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하고 세상의 복이 주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문제가 주어지고 그 문제가 자기 인생을 실패로 이끌어가게 되면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하시느냐?’며 불평과 원망을 내어놓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에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루신 화평의 관계에 있는 신자라면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이루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아무리 힘든 고통과 어려움의 문제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 또한 자신을 생명의 나라에 굳건히 붙잡아 두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일로 바라보면서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주만 바라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신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기에 믿음에 의해서 이러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지 신자가 자기에게 있는 믿음을 가지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화평은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된 것이지 세상과 연관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평화가 교회의 일이 될 수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오신 것처럼 말하는 것 역시 성경과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세상에 평화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스포츠 등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경쟁이며 자국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평화는 다만 인간이 꿈꾸는 이상일 뿐입니다.
3. 화목하게 하는 직책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즉 신자는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로 보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면 화평케 하는 자,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도 이렇게, 즉 신자가 있는 자리에서 싸움과 분쟁이 있을 때 싸움과 분쟁을 말리고 화해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껏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화평케 하는 것이 그런 의미의 말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런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음을 먼저 생각해야만 합니다.
항상 말씀드려 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 있는 모습들은 불신자에게는 불가능하고 오직 신자에게서만 나타나야 할 고유의 복입니다. 그런데 화평이 겨우 세상의 분쟁과 다툼과 싸움을 말리고 화해시키는 중재 역할 정도로 이해를 한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이루신 화목의 가치와 존귀함을 가볍게 여기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또한 화목이라는 단어를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결국 교회가 다툼과 문제가 없이 모든 교인들이 사이좋게 잘 지내는 관계로 이해하면서 그러한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소위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맡긴 화목하게 직책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화목은 세상의 친목 모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그런 세상의 친목 모임과 같이 친밀한 관계로 만들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셨겠는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목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용서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심으로 죄값을 치르셨고 그래서 우리는 그로 인해 죄가 가려지고 용서를 받음으로 죄 없는 자로 하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즉 성경이 말씀하는 화목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화목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그리스도의 용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용서를 증거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란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는 자로서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자신은 그리스도 밖에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 져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존재할 뿐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 거하고 살아가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교회의 모임 안에서도 자기에게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은 자이고, 얼마나 많이 배운 자고, 얼마나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인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자는 다만 그리스도의 피의 용서만이 가장 존귀함을 증거하고 또 증거 할 뿐입니다. 이것이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가장 존귀함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에게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로 나오도록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세상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주어진 용서의 은총으로 감사하고 그것만을 자랑하고 높인다면 그 관계야말로 가장 화목한 관계일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 안에서는 누가 크냐는 다툼도 있을 수 없고, 자신이 더 높아지고자 하는 경쟁이나 시기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참된 화평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화목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주셨는데, 사람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에 비해 받은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불평과 의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불화입니다.
자신 스스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할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멀어져 있을 때 그에게서 나타날 것은 타인과의 경쟁이고 자신이 더 크고자 하는 욕망일 뿐입니다. 그것은 이미 화평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의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한 용서의 은총만을 존귀하게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로 인해 증거되고 이루어지는 것은 화평입니다.
교회는 그런 그리스도의 용서를 알고 믿는 신자들이 모이는 거룩한 모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총에 감사하고 살아가는 증거는 화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총만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툼과 분쟁이 아니라 화평으로 새 생명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주안에서의 통치와 다스림을 누리며 매일을 살아가는 아름답도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세상에 원하는 것과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
2. 예수님이 검을 주러 오셨다거나 또는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것이라고 합니까?
3. 주를 믿는 신자가 세상과 조화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하고 원수의 관계에 있던 인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5.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진정한 화평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화평이 주어지기 전의 인간과 주어진 이후의 인간은 어떻게 다르다고 말씀합니까?
7. 신자에게 주어진 화평케 하는 자,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이해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어떻게 다릅니까?
8. 그리스도의 용서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그 안에 사는 신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9.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참된 화평의 모습과 하나님과의 불화의 모습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