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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상의 소금과 빛
본문 /  마 5:13-16

 

1. ‘돼라’가 아닙니다
세상은 종교성을 가지고 보기에 신자의 신자 됨을 항상 도덕과 연결하여 생각합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연히 테레사 수녀 같은 분을 가장 신자다운 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많은 신자들은 아마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테레사 수녀처럼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자신을 돌아볼 때에 테레사 수녀처럼은 못돼도 그래도 어느 정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착한 행실은 있어야 빛과 소금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도저히 그러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나 자신에게 자기 신앙을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신자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려고 하나 변화되지 않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신자에게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고, 14절에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신자는 세상에서 이미 소금과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이미 세상에서 소금이고 빛이다는 의미로 이해를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왜냐하면 16절의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는 말씀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소금이면 세상에서 짠맛을 내어야 하고, 빛이면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짠맛과 빛의 의미를 도덕적 선한 행동과 연결하여 ‘신자는 테레사 수녀처럼 선하게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신자다움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과 똑같이는 살 수 없다고 해도 그들처럼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많은 신자가 자신의 신자 됨에 대해 당당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읽어 보면 ‘너희는 소금이니 짠맛을 내어라’고도 말씀하지 않았고, ‘빛이니 빛을 내어라’고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3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고 하는데 이 말씀에 ‘소금이 되어라’거나 ‘소금으로써 짠맛을 내어라’는 의미는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짠맛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소금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말씀할 뿐입니다.
또한 14절부터도 보면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고 하시는데 이 말씀 역시 ‘빛이 되어라 세상에 빛을 비춰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 비춰지는 빛으로 존재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세상이란 말의 의미
어쨌든 예수님은 신자를 세상에서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를 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곳이라는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가 불황이니 뭐니 하면서 경제적 위기설이 나돌고 있지만 그것이 이 세상의 정확한 본질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정확한 본질은 죄로 인해서 생명에서 멀어지고 대신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때문에 세상을 두고 여러 가지의 이상과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대해 어떤 이상과 환상을 가지던 중요한 것은 결국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에 갇혀 사망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결국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착해지고 그래서 범죄가 사라지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화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기를 주저하신다거나 세상을 아까워하실 일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기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이 하나님의 뜻까지 포기하게 하는 인간 승리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단지 인간의 허황된 생각일 뿐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신자는 저주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생명을 가진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별은 도덕적 선한 행실이 아니라 생명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소금의 짠맛이나 빛의 의미도 생명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신자는 생명이라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특성을 가진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 소금과 빛이 담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이 특성은 도덕적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지만 신자의 특성인 생명이 도덕적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도덕적 행실을 보고 그를 생명을 가진 자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3. 생명의 특징
그러면 이 생명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생명을 가진 자로 세상에 존재한다면 생명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쓸모가 없다고 하시고 빛을 등경 위에 두어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췬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명이 있다는 것의 특징을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생명의 결과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즉 열매는 생명이 있다는 흔적인 것이지 열매가 곧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생명 자체보다는 열매를 맺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빛을 비추고 짠맛을 내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불태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저주의 나라인 애굽에서 구출 받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땅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죽음을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장자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재앙을 넘기고 애굽에서 빠져나온 생명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신명기 11장에 보면 “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11: 8- 9)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이며 이 실패로 말미암아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생명에 도달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의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보내신 의가 곧 생명임을 깨닫고 그 의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특징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이야기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습성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한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고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4.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
그래서 신자가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내 열심과 여유로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일은 신자들 대부분이 잘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솔직히 TV 방송국의 불우 이웃 돕기 모금에도 제대로 줄 서 본적이 없는 것이 우리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자가 세상 앞에 증거하고 보여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우 이웃을 돕는 것으로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착하게 살아서 자신을 선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면 분명 착한 행실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감춰지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의롭고 착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또 그래서 더욱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의로 악을 행하며 세상으로부터 욕을 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령 테레사 수녀처럼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듣는 일을 행했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 역시 속에 악을 품고 살아가는 악한 자일뿐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지옥 갈 수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소금으로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착한 행실입니다.
신자는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자이지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의 선한 행실이 세상에 감동을 줄 수는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심지어는 신자보다 더 선하게 행동할 수 있고 더 큰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짠맛은 소금에만 있는 것이지 설탕도 짠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소금만이 가지고 있는 짠맛이라는 특성, 빛에서만 나오는 빛이 있는 그런 존재가 신자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고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과 사람과 사단이 우리를 흔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그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평강과 자유함 드러내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만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기에 끝까지 붙드는 모습으로 신자의 특성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빛과 소금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 신앙생활은 힘들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벗겨주신 멍에를 다시 쓰려고 애쓰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선행을 하고자 하는 노력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금과 빛이 되려고 하고 선행을 하려고 하는 그 이면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는 살펴야만 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선을 통해 자신이 신자임을 증거하고 싶은 욕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인간의 선행을 신앙의 증거물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미 소금이고 빛입니다. 그냥 소금으로 살면 되고 빛으로 살면 됩니다. 뭘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하늘의 생명을 가진 신자로 세상이 아니라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왜 신앙인들은 자기 신앙을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기게 된다고 합니까?

 

2.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다릅니까?

 

4. 하나님의 신자와 신자가 아닌 자의 구별은 무엇으로 되어져야 한다고 합니까?

 

5. 오늘 본문의 빛과 소금이 담고 있는 참된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성경의 관심과 신자의 관심은 어떻게 다르며 그 다름으로 어떻게 산다고 합니까?


7.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며 이스라엘은 그 요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였다고 합니까?


8.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어떻게 바뀌었다고 합니까?


9. 신자가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며 또 그런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감춰지고 또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소금과 빛으로 사는 신자의 착한 행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난 신자의 생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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