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율법의 요구
본문 / 마 5:17-20
1. 믿음의 결과는 행함의 변화가 아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희생이라는 정신과 함께 신자로서의 삶의 덕목을 가르치시고 배우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수훈을 도덕과 윤리적인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신자를 항상 도덕과 윤리라는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처럼 도덕과 윤리적으로 철저하고 수준 높은 덕목을 쌓고 실천하는 것이 곧 신자다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가 도덕과 윤리적인 문제로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놓치는 것이 곧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같은 수준에 머물게 되는 가장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결과를 행함의 변화에 두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나아진 행함의 변화야말로 그가 구원을 받았고, 거듭났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령 담배를 피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술을 먹던 사람이 술을 끊고, 도둑질을 하던 사람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 눈에 드러나는 악행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기 시작하는 그러한 것을 좀 더 나아진 삶의 변화로 규정하면서 그 모든 것이 믿음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행함이 달라지는 것을 신자의 변화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믿고 있는 비신앙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을 가장하여 신자를 유혹하는 사단의 계략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행함의 변화가 믿음의 결과라면 분명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모습들이 불신자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결과란 오직 믿음으로 인한 결과라는 뜻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행함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말하는 행함의 변화라는 것들은 불신자의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고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이고 불신자들도 잘 실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것을 믿음의 결과라고 하고 거듭난 모습이라고 한다면 거룩한 진리의 세계인 기독교를 스스로 썩어질 세상의 규범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도덕과 윤리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적인 삶,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부당한 일을 하지 않고 남을 도우며 사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이 성자로 여기는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들 역시 부당한 일을 하지 않고 남을 도우면서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았던 삶이었기 때문에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그렇게만 살면 믿음대로 사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2.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은 율법을 완벽히 지켜 행하심으로써 수준 높은 도덕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분이 됩니다. 잘 아는 대로 안식일 규례를 지키지 않아서 바리새인들과 충돌을 일으키셨고, 음식을 먹는 규례에서도 율법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를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율법을 행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이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선지자라는 말을 덧붙여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케 하고자 하시는 것이 율법, 즉 모세의 계명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임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믿음의 결과를 말씀의 실천으로 인한 행함의 변화에 둔다면 그 기준을 세상의 윤리와 도덕에 둘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멋대로 나눠 버립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무시해 버리고 어떤 것은 귀히 여기면서 귀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신자로 규정하거나 삶이 변화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도취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18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이어서 19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고 말씀하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은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표현을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크고 작은 것으로 구분하여 큰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고, 작은 계명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고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계명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고 버린다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천국에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천국에 그러한 구별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동일한 지옥입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천국에는 작다 일컬음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들어가지만 작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보기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만을 골라내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실천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사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은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이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 앞에서는 나름대로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지 않고 주일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레위기 19장에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고 하여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있고, 면제년이 되면 이웃에게 꾸어준 것을 면제하라는 규례도 있습니다.
잠언서 3장에도 보면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잠3:27)라는 말씀도 있고, 30절에는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잠3:30)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말씀 중에 작은 것, 지켜도 되지 않는 가벼운 것이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웃에게 베풀기를 아끼면서도 조금 베푼다는 것으로 마치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이웃과 다투면서도 자신이 말씀을 어겼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며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한 것, 가벼운 것으로 나누고 있는 것이고 가벼운 것은 상대적으로 버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결과를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기면서 행함의 변화를 주장한다면 구약의 말씀 전부까지 실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것은 지켜야 하지만 어떤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을 한다면 그것이 곧 오늘 본문의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는 말씀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완전한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3.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는 인간
이러한 율법의 요구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누구도 율법을 완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지만 완벽한 실천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율법을 완벽히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을 제시하고 그 수준을 목표로 삼고 살 것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점차 나아지는 변화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들은 산상수훈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것이 끝까지 인간의 가능성과 의를 앞세워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단의 방식인 것입니다.
율법은 완벽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 앞에서 인간은 ‘나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하는가를 절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서 나올 것은 바리새인들의 모습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 역시도 율법을 구분하고 중요하다고 여긴 것만을 지키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하라는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은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으면서 자기들만큼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없다고 자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믿음의 결과를 행함의 변화에서 찾으려고 하고, 조그마한 행동의 변화를 보면서 자신이 마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착각하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봐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완벽히 실천할 수 없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4. 더 나은 의
그렇다면 믿음으로 인한 신자의 변화는 율법을 완전케 하신 주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실천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율법에 완벽히 실천하신 주님의 의가 나에게 구원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인한 신자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다 아는 이야기를 마치 새로운 이야기처럼 말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아는 그 앎이 참되다면 절대로 믿음의 결과를 행함의 변화나 말씀의 실천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들이 곧 십자가를 결별하고 독립하여 인간의 의로 살겠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의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곧 영원한 사망을 뜻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언제까지 십자가에 매어 살아야 하느냐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고 사단이 인간에게 꾀하는 것이 바로 그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말씀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다른 직업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온 힘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선행과 구제와 십일조 생활로는 그들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되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니 어찌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과연 그들보다 더 뛰어난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제아무리 수준 높은 도덕과 윤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입니다.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란 전혀 다른 의를 뜻합니다. 그 의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예수님의 의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과연 누가 말씀의 실천, 행함의 변화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그럼 신자는 형편없이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여전히 인간에게 초점을 두고 말씀을 대하고 있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율법을 완벽히 이룰 수 없고, 그래서 결국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나에게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님이 오셨고, 그분의 의가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함을 믿게 되었다면 신자는 주님의 오심과 그 사랑에 감사하며 주께 매인자로 살게 됩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고 살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가 과연 세상이 볼 때 형편없는 모습을 보이게 되겠습니까? 신자는 세상이 볼 때 전혀 다른 의의 모습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입니다. 성령이 신자를 그렇게 살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의 의를 의지하면 그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고 높은가를 자신의 허물과 죄 속에서 깨닫고 또 깨달으면서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 점령된 심령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으로 인한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심령이 이러한 뱐화로 충만하여 주만 바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이 갖는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또 그 오해로 말미암아 드러나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2. 우리는 신자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며 그러나 그것이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까?
3.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자기도취식 신앙은 무엇입니까?
4. 천국에서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주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5.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6.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탄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고 합니까?
7. 신자인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봐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믿음으로 인한 진정한 믿음의 변화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9.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며 또 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입니까?
10. 주를 믿는 신자인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