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월 22일 / 마태복음 28. (마 5:21-26) 옛 사람의 율법

by 관리자 posted Jun 2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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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옛 사람의 율법

본문 / 5:21-26

 

1. 불필요한 계명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고 그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도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이 살인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즉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없다고 해도 세상은 살인을 죄로 여기면서 아무리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참고 인내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살인에 대한 규례만이 아니라 도둑질이나 간음에 대한 규례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계명을 남기지 않아도 세상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을 기준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사회를 지키고자 애를 썼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굳이 세상이 도덕으로 여기는 규례들을 말씀하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등의 하나님의 계명은 잔소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이 없었다면 자기들 마음 내키는 대로 살인을 하고, 도둑질을 하면서 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방 나라와 마찬가지로 질서를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들어 세웠을 것이고 인간의 양심 또한 살인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등의 도덕과 같은 계명을 주신 것은 어찌 보면 쓸데없는 일이었다는 결론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계명을 주지 않아도 살인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으면서 잘 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상관없이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또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살인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님의 계명 때문이었습니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살인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도덕과 양심, 살인자에 대한 세상 법의 제재와 또 살인죄로 세상에 노출되었을 때 무너지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 등등 여러 가지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살인을 막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순간적인 분노가 그러한 조화를 깨뜨림으로써 살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분노로 인한 살인 충동이 있다고 해도 살인에 따른 결과 등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불필요한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계명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살인을 하지 않고 인간관계를 적절히 유지하며 살아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등의 계명들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들이 없으면 당장 세상의 모든 질서가 무너진 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나 복수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고 탐나는 것은 거리낌 없이 도둑질하는 그런 사회가 될 것으로 여기시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지금껏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구축된 도덕과 윤리고, 국가의 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이 없다고 해서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란이 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계명의 수준을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계명을 지킨다는 것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그런 의미로 생각했습니다. 즉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을 향해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라가, 즉 바보라고 조롱하는 것이나 미련하다고 하는 것까지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인 살인을 더 강화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살인죄의 범위를 새롭게 확대해서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단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만 여겼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옛사람의 생각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는 형제를 향한 분노와 조롱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새롭게 확대하여 해석하신 것이 아니라 살인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살인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점을 언제로 보아야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법으로는 아벨이 가인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을 때입니다. 비록 가인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해도 아벨이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살인죄는 아닙니다. 다만 살인 미수죄가 적용될 뿐입니다. 더군다나 마음속으로 아무리 아벨에 대한 시기와 미움과 분노가 있다고 해도, 아무런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실제 아벨이 입은 피해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옛사람의 관점에서의 살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모두 다 이것만이 살인이라는 개념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새사람 된 지금의 신자로서의 살인에 대한 시각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시자 가인이 그로 인해 분노했을 때 가인은 이미 살인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이 전혀 보지 못하고, 또 생각지도 못했던 죄를 드러내신 것이며 새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과 말씀 가운데서 배우고 알아야만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옛사람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계명의 내용이 조금 달라진 것은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를 자기들 마음대로 규정하고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주일 성수이고, 예물을 바치는 행위이고 그 외 교회가 신앙적인 행위로 여기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적 행위이고 그 행위로 인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기복주의를 배척하면서 헌금해서 복 받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교회가 세상에서 아름다운 일을 하고, 헌금을 할 때 이름을 적지 않고 하는 것 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적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가 않는 것입니다.

 

3. 바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보면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대개 형제와 불화한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없으니까 형제와 화해를 하고 화목해진 관계를 만든 후에 예배를 드리라는 뜻으로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의 사고방식 그대로 이해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옛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제단에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바친 예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에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말하면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또한 복을 받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형제에게 노하고 미련하다고 욕을 하는 존재가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고 미련하다고 욕하는 것을 단지 형제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게 되면 도덕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에게 노하는 것이 왜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단지 형제에 대해 분노했다는 그것으로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이 문제는 형제라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예를 들었던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가인이 아벨에 대해 분노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즉 가인의 분노는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것은 받으시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한 분노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것은 나는 잘못되었는데 이웃은 잘되었을 때 그 이웃에 대해 시기하고 분노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이웃이 잘됨으로 인해서 자신이 뒤로 밀려날 때 그 분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잘되고 못 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잘된 이웃에 대해 분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에 있지도 않으면서 예물을 바쳐서 복을 얻고 은혜를 받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 하라는 것은, 의도적인 화해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형제를 미련하다고 하고, 신앙이 없다고 판단하고 조롱하기 이전에 자신이 먼저 미련한 놈이요 신앙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이며 복을 달라고 할 자격도 없고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철저하게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고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제대로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진심으로 보게 되었다면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욕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뭔가 바쳤다는 것으로 자신을 신앙이 있는 신자로 여기고 복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악을 쌓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참된 예물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께 들고 나올 예물은 가난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는 예물은 심령의 가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와 소제를 기뻐하시지 않고 애통해하는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령 역시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예물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뭔가를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그 속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뭔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한 우리에게 일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온다고 해도 언제 또 형제에 대한 노함과 시기가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함과 신앙을 내어놓지 못하고 예수님만 의지할 뿐입니다. 신자는 그저 이 마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마지막 오늘 본문에 보면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5:25-26)고 말씀합니다.

이웃이 우리를 고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웃에게 피해를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화해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나를 재판관 앞에 서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재판할 정도로 싸우고 미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재판관 앞에 서지 말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나를 고발하는 자가 아무리 밉다고 해도 먼저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예수 믿고 난 후에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 다 없어질 것이라 기대하지 마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미워하는 사람은 있고 또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가지는 미움에 대한 분석은 다른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가 나에게 있지 않고 상대에게 있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미워할 동조자를 찾아다닙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그런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저 사람이 워낙 그래서 미워한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동의를 구해서 미워하는 이유와 핑계를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러나 믿고 난 후에는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자기 잘못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속이 좁고, 이해력이 부족하고, 동정심이 부족해서 아직도 미움이 남아서 짜니까 나오는구나 하고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 위해 오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되었지만 완성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은 완성을 향하여 가는 과정이므로 부족하고 못난 것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빛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 안의 어둠은 더 밝히 조명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럽기도 합니다. 내 자존심이 다 드러나고, 내 부끄러움이 다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완성을 향하여 나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오직 믿는 자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것이 복이며, 이것이 우리가 주님이 허락한 모든 삶의 환경에서 해야만 하는 신앙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오늘 본문에 한 푼이라도 남김없이 다 갚으라는 말씀을 합니다. 구약에 보면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면 얼마를 배상할 것에 대한 규례를 세워 두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규례로 이웃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지 않습니다. 비록 보상을 한다고 해도 남김이 없이 다 갚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에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입니다.

하지만 구약에 이웃에 대한 배상법이 있는 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주어진 법입니다. 따라서 한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으라는 것도 피해를 준 것이 있으면 철저히 갚아야 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과 연결되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겉으로 친한 척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하나님은 멀리하면서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양심껏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오늘도 비록 또 죄 가운데 쓰러지고 넘어질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나를 용서한다는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은혜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과 환난과 죄악과 악함이 우리를 삼키려고 덤빌지라도 주님을 붙들고 있기에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사는 길은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길 말고는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빛 가운데로 걸어갈 때 신자는 자연히 예수님이 행하신 공로만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라면 이웃이 나보다 잘된다고 해서 노하는 것은 보이지 않지 않겠습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에 갇힌바 되어 주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의 계명을 윤리 도덕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말씀이 잔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자가 하나님의 살인하지 말라는 등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실천한 것을 두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과 같다고 합니까?

 

3. 예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내용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4.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옛사람이 이해하는 것과 새사람이 이해하는 것의 내용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5. 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나님 보시기에 형제와의 화목이 하나님과의 화목과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7.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물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8. 신자는 하나님의 허락하신 매일의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9. 미워하는 자에 대한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의 분석은 어떻게 다르다고 합니까?

 

10. 세상 사람과 신자인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가지는 마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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