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간음하지 말라
본문 / 마 5:27-32
1.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귀한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문제를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놀라게도 하시고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말씀이 바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금지한 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심심찮게 사형 제도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면서 ‘사형집행을 명령하는 법무부 장관은 살인을 한 것인가 아닌가’, ‘전쟁을 할 때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가지고도 논쟁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논란이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인은 악한 것임을 깨닫고 ‘사형 제도도 살인이니까 폐지하자’는 논란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없다고 해도 인간에게 있는 양심이 작용을 하여 살인은 악한 범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은 살인을 방지하고 살인한 자를 처벌하기 위한 역할로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형제에 대해 노하고 욕하는 것까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살인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이라는 죄와 이웃에 대해 노하고 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수준의 것으로 구분합니다. 이웃에 대해 노하고 욕하는 것이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살인이라는 죄에 비하면 죄도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살인이라는 행동과 이웃에 대해 노하고 욕하는 행동에 차이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인과 형제에 대해 노하고 욕하는 것을 동일한 악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과 지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살인에 비해 이웃을 욕하고 이웃에 대해 노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살인에 비하면 죄라고 할 수도 없고, 오히려 사람이 살면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그래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살인과 동일한 악으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인에 이어 간음에 대한 계명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간음은 남편이나 아내가 있는 사람이 다른 남자, 또는 여자와 함께 동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말씀 하심으로서 간음이라는 죄를 육체적 관계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음란으로까지 해석해 버리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서 죄는 행동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죄에 대한 기존의 시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에게 노하고 욕하는 행동이 살인이라는 행동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 분명하겠지만 그 마음에 잠재된 악을 놓고 본다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살인을 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2. 나라는 지체보다 몸이 중요하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마음의 음욕까지 이기라는 취지의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행동을 절제하고 다스릴 수는 있지만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움과 음욕과 같은 악한 생각까지 다스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러한 악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의도적으로 다른 생각을 함으로써 잊어버린다고 해도 악한 생각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악이 그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존재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앞에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는 말씀을 하신 뒤에 오늘 본문과 같은 계명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말씀의 의미를 드러내심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의가 왜 천국에 들어가는 의가 될 수 없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9절부터 보면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5:29-30)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른눈을 빼고 손 하나를 자른다고 해서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신체로 인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몸이 중요하냐 아니면 지체 하나가 중요하냐’라는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생각에는 몸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지체 중 하나가 중요합니까? 물론 몸이 중요할 것입니다.
만약 지체 중 하나로 인해서 온몸이 죽게 된다면 그 지체를 잘라내고서라도 몸을 살리고자 할 것입니다. 몸이 죽는다면 그것은 모든 지체가 죽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습니다. 한 몸의 관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지체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산다면 신자는 지체의 위치에 있는 자신보다는 몸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몸을 생각하기보다는 나 한 개인에게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내가 잘되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삼고 나의 유익과 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관계 안에서 나는 부인되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를 부각시키고 싶어 하고 타인이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죄 문제에 있어서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은 아무짝에 쓸모없음을 알게 합니다. ‘나’라고 하는 한 개인을 생각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이 율법을 지키면 분명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박수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을 지켜 구원받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와의 관계에서는 아닙니다. 몸 된 교회는 몸 된 한 지체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몸 된 모든 지체는 오직 머리되신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스스로 자기를 살려야 한다는 마음의 상태가 이미 간음한 것입니다. 피조물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고 나선 것이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3. 간음
하나님의 십계명 중에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7계명이지만 이 간음에 대한 것도 결국 탐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중에 마지막 계명인 열 번째 계명에 보면 ‘탐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것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네 이웃의 아내’입니다. 결국 간음의 문제도 마음의 탐심이며 이 탐심은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1-6)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탐심이 곧 간음이며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악은 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씨앗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씨란 온도와 습도가 맞으면 발아하듯이 우리 안에 탐심이라는 죄는 그 환경만 맞으면 얼마든지 발아합니다.
우리 안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악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한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서 죄가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적 간음은 단지 남녀 관계의 간음만이 간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죄의 근원을 사람의 마음이고 또 그 마음은 이미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나 종교의 경전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이나 종교의 경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주체로 대접합니다. 결국 모든 결정은 사람의 자기 선택에 달려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태도가 이미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서 간음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고 합니다. 여기 ‘간음한 여인들아’ 앞에 보면 3)이라는 각주가 되어있는데 성경 밑에 각주를 찾아보면 ‘간음한 사람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음한 자들이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경에서의 여자는 하나님의 신부 곧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은 교회 곧 여자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 간음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과 벗 되고 하는 것이 바로 간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회라고 모여서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잘 확인하시고 우리가 앞에서 나누었던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탐심 곧 땅에 대한 탐심이 우상숭배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곧 간음임을 믿으며 잘 점검하셔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말씀을 실천해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발상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만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말씀을 실천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엉뚱한 발상들을 접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신자에게 앞으로 남은 것은 나라고 하는 한 지체는 항상 부인되어야 하고 다만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관계에서 몸이 되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입니다.
4.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원 받는다
오늘 본문 마지막 31절부터 보면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도 앞에서 말씀 말씀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결혼에는 두 몸이 만나 한 몸의 관계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하나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결혼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두 몸이 한 몸 된 관계로 살아가지를 못하고 각자 자신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이미 자신을 사랑하는 죄악에 물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 된 관계로 살아가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다 보니까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하는 것도 각자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죄의 흔적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혼을 하지 않으면 그러한 죄에서 벗어난 것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다른 이성을 보면서 음욕을 품는 것이 이미 한 몸의 관계를 깨뜨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은 이 세상에 의를 증거하고 나타낼 수 있는 몸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하지 못하고 사망으로만 달려가고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몸으로 선행을 실천하여 의를 나타내고 증거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 홀로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죄는 우리의 손에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죄의 해결사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예수님께만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의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한 몸의 관계에서 벗어나 나 홀로 독립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고, 구원을 얻었고, 성령도 받았으니 나도 의를 행하고 의를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예수님에 대해 이혼을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의만 이야기하면서 나의 의는 묻히고 내가 드러나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나라는 지체가 잘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분노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무너뜨리면서 그들을 천국으로부터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각기 개인으로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행위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우리의 심성 자체가 천국에는 도무지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악합니다. 이 심성을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심성을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끗하게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라고 해도 천국에 해당되지 않고 천국에서 이미 잘라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입니다. 남은 길은 거룩한 몸의 지체로 소속되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룩한 몸에 소속된 지체가 된다면 그 지체도 거룩한 몸으로 여김 받고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우리를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가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찢겨진 살이 죄인된 내가 흘리고 찢어져야 할 피와 살이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나 대신 죽으신 주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나 같은 자를 거룩하신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입니다.
신자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간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히 자신은 부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자기 생각 하나로 자신을 신자로 인정하지 마시고 우리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 앞에서 부인되어지고 있는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나의 행함과 나의 의,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에 감사하며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는가를 살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의로 기뻐하시면서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십시오. 구원은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가 생각하는 간음과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인간의 죄가 눈 하나 빼고 손 하나 자른다고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신자가 예수님과 한 몸 된 관계를 인식하며 사는 것과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관계에서의 간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관점에서의 간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윤리 도덕이나 종교의 경전으로 여기는 것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는 간음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8. 오늘날 교회로 모여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간음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9.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과 다른 참 의는 어떤 것이라고 말씀합니까?
10. 결혼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법칙은 무엇이며 또 그럼에도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11. 신랑이신 주께 신부 된 우리가 이혼 신청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