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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본문 / 6: 1- 4

 

1. 하나님의 뜻이 은밀한 선행인가?

오늘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혹시 선한 일은 은밀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이러한 생각은 오늘 본문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 됩니다.

선한 일은 은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비록 세상이 오늘 본문의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6:3)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남이 모르게 하는 선행을 아름다운 것으로 칭찬하지만 그것은 성경 말씀 때문에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은 은밀한 선행을 아름다운 것으로 칭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즉 성경 말씀이 없었다고 해도 세상은 은밀한 선행을 더 차원 높은 선행으로 여겼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간혹 TV를 보면 익명으로 거액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 모두가 과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성경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익명으로 기부한 것이겠습니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경의 예수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기 생각대로 익명으로 기부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말씀과 상관없이 은밀한 선행을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세상은 그러한 선행을 아름다운 것으로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굳이 은밀한 선행을 가르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누구의 윤리가 더 수준 높은가를 경쟁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추구하는 의와는 전혀 다른 의를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이 의로 여기는 모든 것이 의가 아님을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역할은 자기 나름대로 의를 추구하는 세상을 향해서 의가 없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낮은 수준에 있는 의를 좀 더 훈련 시키고 가르쳐서 높은 수준의 의를 행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신자인 우리에게 은밀한 선행을 하라고 가르치신다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1-2)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제를 행하였으나 구제라는 자기들의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행하는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구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의 선행을 남들에게 드러내어서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의도의 구제로 볼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러한 생각은 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 아닌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는 수준의 생각입니다. 즉 선행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오른손과 왼손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앞에 마태복음 5장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선행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수준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런 수준의 의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거듭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그런 의는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는 문구가 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6:3)입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이 말씀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로 곡해합니다.

이 말씀이 자기 선행을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라면 차라리 구제할 때에 남들이 모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오른손과 왼손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뜻합니다. 즉 오른손도 내 지체고 왼손도 내 지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말은 내가 한 것을 나도 몰라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른손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손은 몸의 한 지체이지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왼손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그것은 곧 나 자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절의 본뜻은 내가 한 것을 나도 모르게 하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한 일을 자신조차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은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나오는 그 사람처럼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많은 돈을 들여서 구해준 일이 있다면 그 일을 과연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을 주막에 맡기고 떠난 후로 구해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세월이 흘러가면서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구해준 그 사람을 만난다면 자신이 베풀어 준 선행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구해준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면 과연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내가 너를 구해준 은인인데 그것도 모르고 나에게 이렇게 하느냐?’라고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과거에 자신이 그를 구해준 사람이라는 것을 밝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자신이 한 일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자기가 한 선행을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3. 구제는 일상생활일 뿐이다

우리에게 구제는 일상적인 생활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일입니까? 아마 일상적인 생활이기보다는 특별한 일로 구별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선행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선행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신에게 영광이 되고 의가 된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선행을 자신이 남과 다름을 보여주는 특별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른손으로 하는 일상적인 생활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동안 오른손으로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두 일들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저 일상생활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게 되는 것은 그 일에 특별한 의미를 두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는 나는 착하다라든가 믿음이 있으니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신이 행한 것을 잊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리 자기가 행한 것을 남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한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의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나조차도 내가 행한 것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구제가 대수롭지 않은 일상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제를 많이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구제가 특별한 선행이 아닌 그냥 일상적 삶이 되어서 대수롭지 않은 행동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구제는 특별한 행동이고 선행이겠지만 신자에게는 특별한 행동으로 구별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신자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특별한 행동입니까? 아니면 신자로서 당연한 것이고 일상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분명 신자에게 이웃 사랑과 섬김은 특별한 행동일 수 없습니다. 그냥 신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삶이고 일상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에게는 정상적인 것입니다. 구제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연한 삶이며, 일상적인 생활에 지나지 않은 것을 내세워 자기 영광을 구한다면 그것처럼 웃기는 일은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도 당연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자기 의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을 내세우며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제가 신자에게 당연한 일상적인 삶이라면 신자는 구제를 하는 것으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구제를 하지 않는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즉 구제 하는 것이 정상적인 신자의 모습이라면 구제를 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정상적인지 못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구제를 하는 사람을 보면 구제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단지 부끄러움을 느꼈을 뿐이지만, 신자가 어떤 존재임을 알고 난 후에는 구제를 하지 않는 것이 악으로 다가와야 하고 그래서 자신을 찌르는 아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구제에서 자기 악함을 보라

신명기 15장에 보면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0-11)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러한 규례를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을 이방인에 비해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된 사람답게 은혜를 잊지 않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제하라는 규례로 남기시는 것은 은혜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렸음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증표가 곧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땅에서의 구제는 특별한 선행이 아닙니다. 애굽의 종이었고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을 차지한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당연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있는 그들에게 구제는 선행도 아니고 자랑과 의가 되는 행동도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만약 구제를 행하지 않음으로 가난한 자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악에 거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 4절의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4)는 말씀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남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행한 구제는 하나님이 분명히 갚아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즉 자기 영광을 위해 드러내 놓고 하는 구제보다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하는 것이 더 의가 되는 것이어서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은밀하게 행하려고 하는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구제를 할 때 그 대상을 자신이 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즉 나와 관계된 사람에게 구제한다거나, 내 이름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정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라고 해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도와주는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머리에는 은혜가 기억되어 있는데 삶에는 은혜가 망각되고 사라지고 없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잊은 자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구제가 일상적인 삶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비록 구제를 한다고 해도 자신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자로서 당연한 삶이고 일상적인 생활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고 내게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여기는 악을 보게 될 뿐입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은혜를 망각한 채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제한다고 해도 그것은 구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필요로 한 것을 다 내어놓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당장 5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을 다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조금 주고는 구제했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는 구제라는 것을 하면 할수록 여전히 육신적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즉 구제하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자랑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악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실상을 아는 자가 비로소 주만 바라보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도 의로 여길만 한 것을 말씀으로 주심으로 드러내시고자 하는 성경의 역할의 무엇입니까?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구제를 행하는 수준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3.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주의 말씀을 우리는 대부분 어떻게 이해합니까?

 

4.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잊어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5. 우리가 구제나 선행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그 하루 동안 오른손이 한 일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신자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어져야 한다고 합니까?

 

8. 신자로서의 당연한 삶의 모습은 무엇이며 또 그런 삶을 당연하게 여길 때 신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무엇을 알게 된다고 합니까?

 

9.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셨으며 또 이스라엘이 바르게 살고 있음을 무엇으로 알게 하셨습니까?

 

10.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신자인 우리에게 구제가 일상적인 삶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12.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무엇이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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