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월 10일 / 마태복음 34. (마 6:5-8) 너는 기도할 때에

by 관리자 posted Aug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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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는 기도할 때에

본문 / 6: 5- 8

 

1.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는 인간

인간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분명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지한 실과를 먹음으로 선악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즉 지금 우리 역시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습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는 인간의 눈에 보여지는 인간의 행동도 자연히 선과 악으로 구분되기 마련이고, 선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고 악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기도를 하는 것은 선한 것이고,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악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기도를 하는 신자를 기뻐하신다는 나름대로의 생각도 이끌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구제도 세상 모두가 선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속마음이 어떻든 상관없이 구제라는 행위만으로도 선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제를 하는 자기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기도 하고 그것으로 자기 가치 향상을 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구제라는 행위 자체를 선한 것으로 규정한 바가 없습니다. 행위는 인간의 의지와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가 선한 것으로 규정된다면 결국 악인은 선한 행위라는 탈을 쓰고 자신의 악을 얼마든지 감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서 구제를 행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은 백성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즉 구제는 신자로서 행해야 할 특별한 선행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백성이라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있어야 할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에게 구제는 특별한 선행이 아니라 당연한 삶인 것이고 때문에 특별히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 행위를 타인에게 보여줌으로써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잊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구제가 오히려 악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몰래 하는 구제가 선하니 구제는 몰래 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더 수준 높은 선을 찾으려고 하고 그러한 선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신자답게 되려는 미혹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가 되는 것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5)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누구라도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기도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는 말씀처럼 남들 몰래 하는 기도를 더 선한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다시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평가하려는 습성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2. 행함이 아니라 인간이 문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기도에 대한 잘못됨을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적하신 잘못된 부분만 수정을 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참된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아마 본문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잘못된 신앙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로 고치게 하셔서 참된 신자로 살게 하시려고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행함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구제를 외식하는 자처럼 하는 것도 구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외식하는 자처럼 하는 것도 또 중언부언하는 것도 기도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기도를 하는 인간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신앙 행동을 고치면 참된 신앙인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착각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나 기도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임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증거물이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신 규례들이었고, 그들은 그 규례를 잘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인정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거를 율법을 실천하는 것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문제는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문제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율법을 실천하는 척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모든 문제가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것인데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보지 못하고, 다만 율법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그들은 율법대로 살인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 아니며,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여김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을 자기 행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도록 하기 위해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시간이 되면 엎드려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에 맞춰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과 큰 거리로 나가서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3. 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가?

이것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회당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기도한 것입니까? 물론 행위만을 본다면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임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과 자기 가치만을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행동을 조금 고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멀어진 채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는 구제나, 기도, 그리고 그 외 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행함을 실천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큰 착각일 뿐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서 예수님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도 모르게 방에서 혼자 기도하면 참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에 대한 방법을 고쳐주고자 하시는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인들 모두가 보고 들을 수 있는 대표기도나 공중기도 같은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대표기도나 공중기도는 예외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새벽기도회나 금요기도회 등 함께 모여 하는 기도도 고쳐야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18:19)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은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과는 다릅니다. 이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오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기도한다면 다른 사람이 내 기도를 어떻게 생각할지 눈치 볼 이유도 없습니다. 또한 기도를 잘해서 자신의 신앙과 지식을 보여주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기도를 한다고 해도 골방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종교적 심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게 되고, 행여 기도하면서 실수하지 않을지 염려하게 되고 또 기도를 잘못해서 성경도 모르고 복음도 알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운 마음이 앞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멋있게 잘해보려는 마음, 그것이 곧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4. 참된 현실을 믿는 기도

오늘 본문 7절부터 보면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7-8)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외식 하는 자들의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중언부언을 이방인의 기도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는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목적뿐이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성을 보여야 했으며 그것이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신자가 이러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면, 내 쪽에서 따로 원하는 것을 내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참된 현실을 믿는 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의 기도는 중언부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개 그러면 기도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신자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는 말씀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말씀이 신자로 하여금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를 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면 자기를 부인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으면 쉽고 평탄한 길 보다는 비록 좁은 길이라고 해도 주님이 가신 길을 가는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는 우리의 기도를 보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리고 기도하는 자신을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사실은 자신의 기도에서 죄가 묻어나오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기도를 신앙으로 여겼던 것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연히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를 자신의 신앙의 근거로 삼지 않을 것이고 또 자신을 보여주려는 도구로 삼지도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에게서는 중언부언의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해 항상 불만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많고 좀 더 좋은 것으로 자기 현실이 채워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그것을 위해 자기 열심을 신에게 보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에게서는 이러한 중언부언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계심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실 것이고 따라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은혜임을 믿는 현실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도를 하면 할수록 신자로서 참된 현실을 살지 못하고 이방인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자신의 죄가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땅의 것이 풍성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크신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고 제공하신 하늘의 은총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구할 것은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맛보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마땅합니다.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기도가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눈치 보며 기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즐거워하는 신자로서 아버지의 뜻을 구하면서 그 뜻이 자신을 도구 삼아 세상에 드러나고 증거되기를 소원하는 자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인간은 어떤 습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까?

 

2. 성경이 구제나 기도 등을 선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세상이 선으로 여기는 구제가 하나님께는 도리어 악으로 드러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주께서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적하셔서 알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5.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주신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7.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신 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8.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또 신자의 기도가 그런 이방인의 기도와 같은 수 없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9.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실을 살아가는 신자의 기도는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10.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1. 참된 신자의 삶은 어떠하다고 말씀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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