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월 17일 / 마태복음 35. (마 6:9-15) 주기도문

by 관리자 posted Aug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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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기도문

본문 / 6: 9-15

 

1. 현대인의 기도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도는 모두 일맥상통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각기 다르지만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에게 복을 빌고 자신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에는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신에게 기도할 수 있는가?’라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의 기도로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에 집중됩니다. 기도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에 응답을 받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평생을 기도했다고 해도 기도에 대해 응답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맥 빠지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신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기도에 즉각 즉각 응답해주시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없을 것입니다. 신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야말로 신과 나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을 외부에 과시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 응답에 매우 목말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한 방법이나 비결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게 되고,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기도 응답받은 체험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실상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자로서 이방인과 같은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 에 자기 욕망을 위한 기도만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중언부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만 없으면 인생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근심 걱정이 없이 살면 인생은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의 끝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인생만 생각할 뿐, 행복의 끝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행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행복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흔적이 자신의 몸에서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합니다.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린다고 해도 그 행복조차도 인생의 끝을 막을 수 없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죽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으니, 한번 사는 인생 누릴 것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온통 자기 행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식이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이 모든 것들이 행복의 필수 조건들입니다. 결국 오늘날의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찾아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까? 너희들이 하는 기도는 잘못되었으니까 이렇게 기도하라는 뜻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 기도를 엉터리로 하기 때문에 바른 기도를 하라는 의미로 제대로 된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주기도문만 외우면 참된 기도를 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해서 참된 기도를 하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이방인처럼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는 것은 그들이 기도가 무엇인가를 잘 몰라서가 아니라 여전히 옛사람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4:22-24)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지금 읽은 말씀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처럼 옛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방인의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기도가 옛사람의 때의 기도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른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 기도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임한 새로운 나라의 새 사람의 기도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통 또는 교제라고 말하지만 무작정 기도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나라의 새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하고 그리고 과연 새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왔느냐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인해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주기도문을 암송한다고 해서 새 사람으로 기도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정신을 알고, 그 정신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새 사람으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기도는 우리가 과연 새 사람의 자리에 살아가는지 아니면 옛사람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살아가고 있는지를 드러내 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기도문은 우리의 현 위치를 파악하게 해주는 기도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예수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보게 해주는 것이 주기도문이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이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수십 수백 번 암송한다고 해서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또 주기도문의 그 정신이 우리의 삶에 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기도문은 단지 교회 회의나 행사 그리고 예배의 끝남을 위한 주문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주기도문의 정신이 우리의 삶에 배어 있고 또 교회가 주기도문의 정신으로 존재한다면 지금과 같은 이방인의 기도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주기도문을 평소의 기도 내용으로 삼고 살아가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의 소원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망하는 인생의 행복 문제, 교회 부흥과 나의 잘됨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주기도문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주기도문만 하고 기도를 마치라고 한다면 분명 기도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스스로 신자라고 일컫지만 신자라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내 욕망에 붙들려 살아왔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는 우리의 죄를 보게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주기도문은 이방인의 기도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오직 십자가를 알게 된 새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 의해서 지금까지 붙들고 온 인간이 행하는 기도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또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로 머물고 말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지난주 말씀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것에 대한 불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신앙과 욕망이 그대로 묻어 나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은 전혀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인간에게 전혀 부족함이 없이 지으시고 그 모든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은 하나님께 더 달라고 할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지금의 자신보다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보시기에 좋은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훼방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활약이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간단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마음을 둔 순간 인간은 지금의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자 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위해 구할 것이 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마귀의 유혹을 따라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고 있는 기도는 생명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참된 복의 세계를 보지 못함으로써 세상에 것에 대해 부족해 하고 아쉬워하는 불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인간의 욕망이 묻어 나오는 기도를 신자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행위로 가르치면서 기도라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집단임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기도 내용을 고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기도 내용만 그럴듯하게 고친다고 해서 신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자신의 악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심령이 장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마음이 열리고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연히 은혜를 아는 자로서의 기도가 나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의 정신이 배어나는 삶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무엇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를 계산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을 본다면 그것은 죄일 뿐입니다.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되고, 그러한 나를 건지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이 뜨이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오셔서 그 뜻에 순종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에 마음이 열린 그들이 새 사람이며 이들이 바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귀는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동일한 유혹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게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봐 정성껏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말로 속삭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에 속아서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방식으로 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세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포기되는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이 뜨임으로 깨끗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세계에서는 그동안 구해왔던 세상의 것들이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별 것 아닌 것으로 무시했던 하늘의 것과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가 가장 귀한 보배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도 말씀 앞에 선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눈이 열리고,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할 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불신자들과 종교성을 가진 교인들이 가진 기도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2. 교인들이 이방인과 같은 중언부언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라고 합니까?

 

5. 오늘날 신자들이 주기도문의 정신과 또 주기도문을 평소의 기도 내용으로 삼고 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6.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7. 에덴에서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난다고 합니까?

 

8. 귀의 유혹은 무엇이며 또 그 마귀의 유혹을 따라 하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9. 어떤 사람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다고 합니까?

 

10.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새로운 세계를 사는 자의 시각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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