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월 31일 / 마태복음 37. (마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by 관리자 posted Aug 3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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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라가 임하시오며

본문 / 6:10

 

1. 무엇을 구하는가?

목사들이 설교하면서 교인들에게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와 연관된 구절이나 비유를 인용하면서 마치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주의 뜻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그러나 이렇게 인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의 대부분은 모두가 인위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 주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유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의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7:7-8)는 구절을 대개 어떻게 이해합니까? 주실 때까지 구하고, 찾을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두드리는 것이 기도라고 이해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기도일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는 구하는 것이고, 찾는 것이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렸는가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말씀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기도할 때의 순서를 가르쳐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에도 순서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먼저 구할 것과 나중에 구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먼저 구해야 하는 기도 제목이고, 자기 문제는 나중에 구해야 하는 기도 제목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기도의 순서를 정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신자에게 있어서 관심의 전부는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참된 진리의 말씀이 난도질을 당하고 누더기가 돼버리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누었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이것이 우리가 평소에 하던 기도입니까? 내 이름이 거룩히 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름 앞에서 인간의 이름은 낮아져야 할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가치 없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을 마칠 때나 예배를 마칠 때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모임을 마치고, 예배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주문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기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로 하여금 구하고 찾고 두드리도록 만드는 간절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만 합니다. 그 간절함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이어야 한다면 기도는 진심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만 더욱 강해질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오늘 본문에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기도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까?

 

2. ‘나라란 무엇인가?

이 기도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무엇인가를 모르면 제각각 자기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 것이고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사라지고, 지구상에 수없이 많은 나라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머릿속에 여러 모습의 나라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TV이나 사진 또는 책 등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나라에 대해 설명하고 보여주고 이 나라는 이렇다고 확인시켜 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서 말씀을 통해서 마음으로 그 나라를 봐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또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에 나라에 대해 확실하게 기록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는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미 구약에서부터 출발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왕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다윗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히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7장에 보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6)고 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가 영원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영원히 보전될 이 나라가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은 이미 다윗 왕국에서부터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이방 국가를 정복하면서 이스라엘의 강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치는 것으로 공식적인 출발을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하17:47)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한 말입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전쟁을 여호와께 속한 여호와의 전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힘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왕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오신 왕은 전쟁을 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시고 지키시는 왕이시고, 그 전쟁은 사람의 힘을 요구하지 않는, 다만 하나님의 힘에 의한 전쟁인 것입니다.

이것과 연관된 내용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고 말씀합니다.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시자 무리들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며 놀랍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쏠릴 것을 염려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라면서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일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출하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막연하게 장차 구원받은 자가 영원히 살 천국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나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보존시키시기 위해 사단과 전쟁을 벌이시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3. 누가 나라를 구하는가?

예수님은 이처럼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처럼 이미 임한 나라를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사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까? 다시 말해 사단의 세력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정말 주님께만 순종하고 또 믿음의 길을 가고 싶어 한다고 해도,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육신의 정욕을 좇아가고 있음이 보일 것입니다.

정말 사단으로부터 벗어난 신자라면 육신을 좇아가는 모습은 없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단의 미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에 이끌려서 수시로 말씀을 외면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3장에 보면 기도할 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3:17)라고 기도합니다. 에베소서는 이미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이미도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그들의 심령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도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기도 또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을 구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자신의 이름과 욕망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사단과 그의 부하인 귀신들을 모두 무저갱에 가두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신자는 그때까지 예수님이 우리의 왕으로써 우리를 장악하고자 하는 사단과 전쟁을 벌이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사단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라를 구하는 신자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두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장차 임할 그 나라가 자신이 영원히 거할 본향임을 알고 그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11:36-38)고 합니다. 이러한 모진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라는 말씀처럼 자신들이 이방인이고 나그네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고향이 16절에 보면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고 합니다. 그러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것이 천국 백성다운 것이고 이러한 천국 백성이기에 나라를 구하는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신자 아닌 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세상을 빠져나와야 할 곳으로 바라보는 반면에 신자 아닌 사람에게 세상은 자신이 잘되어야 하고 잘 살아야 하는 곳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홍수심판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버립니다. 그것은 산자의 세상과 죽은 자의 세상입니다. 산자의 세상은 당연히 방주 안의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의 세상은 물에 잠긴 사람들입니다. 물에 잠긴 이들은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을 어리석다고 조롱을 합니다. 왜냐하면 배를 바닷가에서 만들지를 않고 산에 만들기 때문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놀랍게도 고기를 잡는 일에 이용할 수도 없는 배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롱합니다. 조롱하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향인 세상에 무엇을 예비해 놓으셨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판이 임박한 세상으로 보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모든 관심은 세상에서 사는 일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으로만 향한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방주는 분명 어리석은 것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불필요한 무가치한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날의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질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주의 자리에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에 우리를 저주에서 구출하기 위해 오셔서 피 흘려 죽으신 십자가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산에다 배를 만듦으로 만든 배를 물고기 잡는데 써먹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 되는 어리석음으로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유의 넉넉함보다는 십자가의 은혜로 부요해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이 사단과 전쟁을 벌이시면서 빼앗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이 백성들 속에 우리 자신이 속해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세상 속의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나로 존재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요와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혹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복된 자들입니다. 그런 마음의 소원을 품고 사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세상도 방주 안과 방주 밖으로 구분되어진 노아 홍수 때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과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즉 두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산자의 세계이고 하나는 죽은 자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다고 해도 결국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게 되어 있고, 산자의 세계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세상으로 이끌리는 자기 욕망을 한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 선 우리의 갈망은 무엇인가 잘 점검하시어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만이 충만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우리 상식에서의 기도와 성경 말씀에서의 기도의 중요성은 어떻게 다릅니까?

 

2.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영광 받고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또 우리의 그 앎을 성경에서는 어떤 내용으로 말씀합니까?

 

3.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그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 왜 어렵다고 합니까?

 

4.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라가 구약에서는 예표로 어떻게 나타나며 또 그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5. 다윗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음을 알 수 있으며 왜 그 모습이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까?

 

6.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도 임한 하나님 나라를 오늘 본문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는 의미는 무엇인 것입니까?

 

7.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라를 구하는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8.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

 

9. 신자와 신자 아닌 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10. 나님의 나라를 품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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