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월 21일 / 요한복음 89. (요 14:4-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by 관리자 posted Sep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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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본문 / 14: 4- 6

 

 

1. 육의 사람, 영의 사람

신자의 신앙에 있어서 항상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육의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의 문제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약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은 육체에 불과할 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죄 가운데 거하는 인간의 본질이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육체에 매인 자로 살아가는 인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육체에 매임으로 인해 영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날마다 육체의 일로 허덕이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일생동안 육체의 일이 짐이 되고 그 짐에 의해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된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육체가 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이 이미 막혀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사망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육체가 된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일은 생각하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영의 일보다 육체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육체밖에 모르는 자였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우리 마음이 영의 일을 생각하는 새로운 마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의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보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만을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자 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살고, 영의 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오늘 말씀은 도마가 예수님께 길을 물을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처소가 준비되면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있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보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14:4)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14:5)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길이란 것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끝까지 가고 나서 도달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통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성,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이 이미 길이요 진리요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방법으로 이해하고서는 예수님에게 그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모르니 길도 진리도 생명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아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13:33)고 합니다. 그리고 36절에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13:36)고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 즉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으나 그러나 일찍 유대인들에 말한 것처럼 너희가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한 것처럼 너희에게 말하노라 너희도 지금은 올 수가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오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들이 소경이었다는 것이 참된 길이신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도 소경이라서 길을 몰랐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도 못하여 길을 모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사람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기에 더더구나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따라갈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베드로는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 할 뿐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는커녕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은 맹세한다고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 사도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6)고 하였지만 길이신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도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시자 소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기도하자 비늘 같은 것이 벗겨 지면서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도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눈이 가리워져 있으면 길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오직 길 되신 분이 그 사람을 붙들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그 사람을 끌어당겨서 길 안에 넣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지금 주님이 지금은 너희가 올 수 없느나 그러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것입니다. 이후에라는 말씀은 곧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의 마음에서 늘 함께 하심으로만 이 길을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진리

이 길을 만드시기 위하여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8:29)고 하시고 또 42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8:42)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그동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여겼던 자들은 누구에게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의 종인 것입니까?

요한복음 44절에 보시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은 한마디로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무슨 길을 알려 주고 또 도를 전하고 진리라고 말한다 할찌라도 그리고 생명을 준다고 영생을 준다고 말하는 어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가 이미 마귀의 자식이고 마귀의 종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아무리 길이다, 진리다, 생명이다 하여도 결국은 마귀의 종이요 죄의 종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고,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들 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교인들도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들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부처의 가르침을 배운다고 합니다. 즉 부처의 가르침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가 그들의 길이요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떤 교훈과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에 전도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마귀의 종입니다. 다시 말해 죄의 종입니다. 욕심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가 됩니다. 하는 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누가 기분 좋아하겠습니까? 이를 갈며 돌로 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혹 어떤 자들에게는 어찌할꼬하면서 회개를 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인이라고 책망을 하면서 회개하라고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회개하라고 하여도 그 회개를 통하여 내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육신적인 문제 세상의 문제가 풀리기를 원하는 그런 회개만 합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애타하는 그런 회개가 아니라 오직 자기 관심사만 가지고 기도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도 기독교를 심리적인 위안거리고 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의 싸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의 가장 큰 책임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목사에게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전부 좋게 해서 헌금 받고 또 좋은 이야기해 주면서 기독교 신앙을 망가뜨린 것입니다. 목사는 진리를 양보하면 안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서로 짜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이라 여기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는 길을 다시 점검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길을 아시고 길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좇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자신들이 사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다는 말씀에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헛된 일을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가는 길은 아버지께 순종해서 자신의 몸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육신의 생명보다 더 큰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이고 그 길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인데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말리고 붙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4. 신자의 삶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알고 그분을 섬겨주는 것으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곧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생명 안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재주로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로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이 되는 것이며 제자들을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께로 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기에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생명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예수님 한 분의 고난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날 위해서 죽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주면 천국의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고 여전히 육신의 문제로 허덕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보고 산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죽으셔야 했는가를 마음 깊이 새긴다면 우리는 세상을 헛된 것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육체로 끝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처소로 인도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며 사랑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육으로 사는 것과 영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길에서 헤매는 세상과 달리 참된 길에서 진리로 살아가고 생명을 누리는 신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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