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본문 / 마 6:25-34
1. 하나님보다 나
하나님은 자기의 계획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을 벗어나서 즉흥적으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획이 수시로 변동되는 계획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 전에 세우신 계획이고 그 계획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계획대로 일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계획과 뜻을 고집부릴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도구로 존재함을 믿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계획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이 원하는 인간의 계획만 있을 뿐이고,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성사시켜주는 능력을 가진 신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인간이 잘해서 좋은 성과를 올리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당신에게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나의 뜻과 내 계획만 잘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평생토록 당신을 나의 신으로 섬겨주겠습니다. 거기에다 나 죽거든 그동안 당신을 믿은 공로를 봐서 천국에 가게 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린다고 해도 또한 지금의 우리가 매 주일 예배당을 찾아서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어떠한가를 떠나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현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다른 현실을 원하고 꿈꾸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에 뜻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는 말씀을 대하면 자신의 본분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재물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재물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인생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껄끄러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이 아닌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그럼 돈 없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라는 반발로 대항하게 됩니다. 말씀으로 사는 삶보다는 돈으로 사는 삶에 더 큰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 바로 염려인 것입니다.
2. 염려를 지고 사는 인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라고 말씀하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염려를 떠나 살 수 있겠습니까?
인생은 염려로 시작하여 염려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까지 염려를 지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염려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인간의 종교인 것입니다. 인간이 필요로 해서 인간의 입맛에 맞는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김으로써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나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가난하든 부하든 그 모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즉 내가 주인이 된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 된 인생을 살고 있음을 믿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염려는 이 믿음 안에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도 나에게 불리한 것이라면 외면해 버리는 것인 인생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에 붙들려 있는 인간이기에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해 불안감이 있게 되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염려하는 것이 이것 저거이라고 딱히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가는 문제 전부가 염려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내 목숨이나 내 몸과 연관된 모든 것이 염려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평생토록 염려하면서 그토록 갈구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춘다고 해도 사람의 목숨과 몸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을 이룬 인생이라고 해서 목숨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다른 사람보다 두 배 세배로 연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몸 또한 달라지지 않습니다. 평생 늙지 않는 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세상의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목숨과 몸은 모두가 동일한 것입니다. 목숨은 점점 꺼져가는 것이고, 몸은 점점 사그라져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원칙 안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 인간이 이 원칙에 순종하기 싫어서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3. 꽃보다 못한 솔로몬의 영광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솔로몬의 영광입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덧입은 목숨과 몸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을 그토록 갈급해하는 것이고, 주어지지 않으면 염려하면서 자기 인생을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참으로 찬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솔로몬과 같은 인생을 살아보기를 꿈꿀 것입니다. 세상의 귀하고 좋은 것은 모두 마음대로 누리고 사는 인생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한 솔로몬의 영광을 들의 백합화 하나보다 못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눈에 들의 백합화는 그냥 하찮은 꽃에 지나지 않습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우리의 눈에는 그냥 꽃일 뿐이지 영광으로는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영광과 같은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은 겉에 입혀진 것의 가치를 판단해서 사람을 구별하고 대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세상의 좋은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여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들의 백합화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고, 그 꽃 또한 하나님이 입혀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상태로 존재하는 그것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30)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나은 영광으로 말씀한 들풀은 내일 당장 아궁이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자의 영광은 세상의 것으로 만들어 지지도 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늘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보물은 하늘이 아니라 세상에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이 높이는 것은 세상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진 자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영광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4.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진심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보물로 여기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목숨과 몸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그 처지와 형편에 상관없이 늙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라는 오직 예수님의 의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참된 보물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고, 하늘에 있는 보물이 땅에 내려와 저주에 빠진 우리 인생에 빛이 되셨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오늘 본문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6:31)는 말씀처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영광스럽게 여기는 세상은 신자의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인 우리가 거할 영원한 세상은 그리스도의 의가 영광이 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에 마음을 둔다면 자연히 신자인 우리에게 보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눈에 보인 그대로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과시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귀한 것은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를 입은 신자야말로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뛰어난 영광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이라면 염려는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받으면 됩니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받고자 한다면 그 욕심은 우리를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못하면 어떻하나’, ‘오늘보다 내일이 더 적으면 어떻하나’ 등의 염려와 걱정에 붙들려서 평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고 말씀합니다. 내일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미리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예측을 한다고 해봐야 오늘의 것을 기준해서 생각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즉 오늘 건강하기 때문에 내일도 당연히 건강하게 출근하고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내일에 있을 일을 미리 짐작하면서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떻하나?’ 하면서 불안에 떠는 것입니다. 결국 불안은 ‘나는 살아야 한다’는 자기 긍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살아있는 것으로 만족하지를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모습으로 살아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이 우리를 불안과 염려에 매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지하게 십자가를 생각하며 과연 자신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적을 몸에 담고 삽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용서의 은혜를 입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로 여김받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자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솔로몬의 영광에 감히 비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기쁨과 즐거움은 세상의 것에 있지를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 아니라, 염려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와 그 나라가 얼마나 귀한가를 알려주는 내용임을 알아 오늘도 주의 나라와 의만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신자이기를 바랍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예배를 빠지지 않고 헌금과 기도와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삶이란 무엇이며 그런 믿음의 삶을 사는 자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하다고 합니까?
3. 인간이 평생을 살아도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4. 인간들이 추구하는 영광은 무엇이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5. 인간이 추구하는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더 낫다고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6. 신자의 참된 영광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며 그런 신자가 알게 되는 것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세상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보인다고 하며 그런 시각을 가진 신자는 무엇을 보물로 보며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인간이 가지는 염려와 불안은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9. 우리 주께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