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월 23일 / 마태복음 48.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by 관리자 posted Nov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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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본문 / 7:13-14

 

1. 생명의 길은 막혀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취하신 조치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생명 나무의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인간이 스스로 생명 나무로 나아가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것을 깨달았다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고 포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자기 구원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만들어 그 길을 감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종교는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 의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구원과 행복, 여기에 인생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기들 나름대로 구원을 얻고, 인생의 행복도 얻을 수 있는 길로 고안한 결과가 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안에 각기 나름대로 법칙과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하면서 그 법칙과 규범에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써 자신들이 목적하는 바를 신의 도움과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렸지만, 인간은 구원의 길을 스스로 고안해 내어 자신들이 만들어 세운 법칙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곧 주일성수, 십일조, 봉사, 헌신 등등의 종교 생활입니다. 종교 생활을 성실히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결과로 구원에 이르고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과 복이 인간하기 나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는 선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고, 악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종교 생활을 선한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종교 생활이 곧 구원과 연결된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생활을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 종교 생활에 게으른 것은 믿음이 아닌 악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복을 받지도 못하며 설사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부끄러운 구원이고 하늘에서의 상도 없다는 성경과 상관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악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것에서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면 막았던 길을 열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나 수단, 방법을 고안해 내면 안됩니다. 인간이 고안한 그 모든 것은 오히려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좁은 문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종교는 인간의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에 의한 산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말은 인간에게는 자기 구원에 대한 욕망이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 욕망은 성경을 읽을 때도 반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도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보게 되면 열심히 구하고, 열심히 찾고, 열심히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의 눈으로 보게 되면, 구원을 받으려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즉 좁은 문이라는 것을 구원을 받기 위해 들어가야 할 문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름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고안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생하고 절제하면서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개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육신의 편안함과 연관하여 생각합니다. 즉 자기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 받고 잘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남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육신적으로 고생이 되는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복 받고 잘 살려는 의도로 하나님을 찾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기준으로 좁은 문과 크고 넓은 문을 구분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을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진리는 육신의 고생을 통해서 증거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생한다고 해서 진리를 따라 산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과 크고 넓은 문을 육신과 연관하여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은 주변의 이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하나님을 대접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대접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것은 하늘의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인간이 고안하고 만들어 내는 최고의 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의로도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아닌 다른 의로만 가능한 것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자신들이 고안한 선을 가지고 생명을 얻으려고 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 길을 막아 버린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의를 뜻합니다. 결국 그 의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질 뿐이고, 그 의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3장에 보면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1-22)고 말씀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대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의가 되심을 믿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으로 신자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의가 되시는 분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법은 더 이상 없음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떤 실천이 의가 된다거나,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서 복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에게는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선과 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이 믿음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실천하기가 힘들어서 좁은 문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는 길이기에 좁은 문인 것입니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우리 가운데는 신자가 선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예수를 믿은 신자다운 것이고 구원의 증거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이라는 지식에 붙들린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면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곧 하나님의 뜻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거의 모든 교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이고 또한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신자는 주일성수를 해야 하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주일에 신자가 함께 모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인데, 이것을 주일성수라고 이름 붙여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한 지킴으로써 믿음의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좁은 문이 아니라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주일성수라는 것이 인간이 원하고 생각하는 것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따라서 주일성수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인간의 행함, 인간의 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믿음의 길이기 때문에 크고 넓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의가 없음을 고백하며 찔림을 받고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행을 하는 사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만이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인간의 선행이 의가 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만 의가 되고, 예수님의 의로 구원에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하고 가르치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해서 고안된 다른 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이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인간은 반발합니다. 믿음을 받았다면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이 선한 존재로 부각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을 찾는 자가 적은 것은 자신이 포기되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찾는 자가 많은 길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인간의 욕망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지게 하시면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참된 진리와 생명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좁은 길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복된 자인 것입니다.

 
 
(말씀 복습하기)
 

1.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취하신 조치는 무엇이며 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기독교를 종교화시킨 인간이 가지게 된 생각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인간이 자기 구원이라는 욕망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은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4.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하나님의 의도는 어떤 연결점이 있습니까?

 

5.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좁은 문은 무엇이며 그 믿음이 길이 인간에게는 불가하다고 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7.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길은 무엇이며 또 그로 인한 넓은 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8. 믿음이 하는 일은 무엇이라고 하며 또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9. 믿음이 선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은 환영하고, 믿음은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말엔 반발하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넓은 길을 찾는 이가 많고, 좁은 길은 적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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