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월 7일 / 요한복음 95. (요 14:25-31) 보혜사 성령

by 관리자 posted Dec 0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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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보혜사 성령

본문 / 14:25-31

 

1. 성령

성경을 얘기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제 자신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성경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힘들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성경을 보면서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의 이해가 맞다고 여깁니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성경 해석에 대해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성경 해석도 존중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해석을 존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인가는 분명 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한 해석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해석인가를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를 듣는 성도들 또한 어떤 성경 해석을 대한다 할지라도 과연 내각 듣고 있는 이 말씀과 해석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있는가하는 것에 대해 살피는 자세만큼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령이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신비스런 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을 우리 멋대로 상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고 말씀합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대개 사람들은 성령이 오면 나에게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성령이 오시게 되면 능력이 생기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26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말씀을 잊고 있었는데 성령이 오셔서 기억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것이 진리인 줄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기고 마음에서 지워버렸는데, 성령이 오심으로써 그 말씀이 진리며 생명인 것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누구든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자로 산다면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 미련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오신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는 세상의 개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소망을 둔다는 것이 헛된 것을 쫓아가는 미련한 짓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이었던가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신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 한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십니다. 성령은 성령이 하실 일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지신다면 그것은 성령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일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실 일은 정해져 있습니다. 성령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대로 세상을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분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고 그것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람은 세상의 일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피를 찾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6절 말씀에서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겠다는 것은 우리는 무지한 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1+1=2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면 누구에게 성령이 필요한 것이겠습니까? 분명 1+1=2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상식에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시는 말씀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분명 불신자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행위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자로 산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은 먹고 마시는 것, 즉 물질적인 복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것을 나의 삶에서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보다도 또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보다도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사는 것을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미도 주어진 크나큰 복을 땅에 묻어버린 어리석은 자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인에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땅에 묻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은 다 같은데, 그것을 별 볼 일 없게 여기는 종은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과 불만만 가득합니다. 종의 그런 행동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적게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우리가 가볍게 여기거나 별 볼 일 없게 여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한 달란트처럼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셔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는데 나만 겨우 한 달란트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셔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일 뿐입니다. 세상이 크게 보인다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보잘 것 없이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주어진 생명되시는 그리스도는 세상 무엇보다도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3. 주님의 평안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평안은 마음에 근심도 두려움도 없는 그런 평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내가 근심하고 두려워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내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또는 계속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으면 괜히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평안해도 되는가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세상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염려도 두려워도 하지 않는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안에 대해 주님은 앞에서부터 말씀하셨고 그리고 이루십니다.

요한복음 141절부터 보면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1-3)고 합니다. 그러면서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4:18)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제자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하는 사람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근심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 사 먹으라고 말해 준다고 해서 배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려면 직접 먹을 것을 사다가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추운 사람에게 옷 사다 입으라 하지 말고 옷을 사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신 것입니까?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19-21)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때 제자들은 자기들도 잡히면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지는 않을까 두려움과 근심에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을 꼭 닫아걸고 있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미 십자가 지시기 전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고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셔도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렇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기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면서 예수님의 평강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평강을 말씀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평강을 제자들에게 주시는데 처음에는 말씀으로 하시고 부활하신 후에 다신 오셔서 확인을 시키시고 드디어 성령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주신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른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평안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4. 평안을 누림

사도행전 4장에 보면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8-19)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니 유대인들이 가두어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하도록 위협합니다. 그러나 하는 말이 너희의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살기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지금은 담대합니다. 이 담대함이 바로 평안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도 보면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0-41)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고 능욕을 받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다시 나와서는 날마다 그 이름을 전합니다. 다시 붙들려 더 큰 능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매를 맞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이런 평안을 어떻게 세상이 감당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예수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주님의 평안을 함께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은 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 나의 평안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더이상 이 세상의 평가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다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에 목숨을 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환경과 조건을 통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과연 너희에게 내가 준 평안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그만큼 우리의 손해입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희거나 검게 하지 못하고, 생명을 한순간도 어떻게 못 하면서 왜 내일 일을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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