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월 4일 / 신년감사예배 / (엡 5:8-9) 빛의 자녀로 사는 2026

by 관리자 posted Jan 0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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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빛의 자녀로 사는 2026

본문 / 5: 8- 9

 

1. 신앙의 착각

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자답게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누구에게나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책임져야 할 삶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입니까?

이런 질문 앞에 항상 먼저 분명히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구원받은 신자의 삶이라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삶과는 다르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신자들보다 좀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의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구원받은 신자의 삶의 다름은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덕과 윤리적인 삶이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신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윤리적인 삶을 통해서 주변의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윤리적인 삶은 구원 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사랑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본받아서 이웃을 사랑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그 이웃의 자리에 자기 자신들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사랑해주면 사랑이 있는 자로 또 믿음이 있는 신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교회에까지 이어져서 교회에 와서도 살피는 것은 이 교회가 나를 사랑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해주면 사랑받는 그 재미로 교회를 다니고, 반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고 욕하면서 등을 돌리는 것이 사람들의 속성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도 세상 사람이 기대하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아멘이 되어서가 아니라 흔히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함과 그들이 기대하는 사랑이 없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내용대로 오병이어 후에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했던 모든 이들이 주를 떠날 때 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니 제자들은 영생이 말씀이 여기 있는데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고백을 한 제자들 또한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은 갔지만 오늘날 우리가 교회를 다니고 주를 믿는 이유는 제자들의 고백과 같은 것이어야만 합니다. 바로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기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교회에 사람을 붙들어 놓는 것은 진리와 영생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랑이고 친절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날의 목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한 기술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친절 등을 믿음의 모습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말이 주변의 사람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자신의 믿음으로 또는 신앙 안에서의 믿음의 모습으로 연결하여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2. 내가 만든 믿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보면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5:8-9)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자는 어둠에 있다가 주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제부터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즉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신자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자의 빛 된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생각을 가진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연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까? 물론 여기서의 질문은 삶의 조건이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성탄 예배 때 말씀드렸던 요셉과 마리아처럼 평범한 두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일이 개입되면서 벌어진 일들, 즉 자신에게 닥친 수모와 멸시를 감당하면서 또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라도 주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기 손해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와 진실이 우리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때 사람들은 의와 진실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빛의 자녀라는 것은 빛에 의해서 발생한 새로운 사람을 의미합니다. 인간적인 양심과 도덕적인 삶과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여 빛이 된 것이 아니라 빛에 의해서 빛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동 실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빛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빛의 자녀는 착하고 윤리적인 행동과는 상관없이 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어둠이 아니고 빛으로 구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자 됨을 파악하려고만 합니다. 신자라면 신자 아닌 사람보다 좀 더 나은 윤리와 도덕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나은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너희, 즉 신자는 인간적인 행위에서가 아닌 생명이라고 하는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특성을 가진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 소금과 빛이 담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이 특성은 도덕적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번이고 말씀을 드렸지만 신자의 특성인 생명이 도덕적 행실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사람의 도덕적 행실을 보고 그를 생명을 가진 자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신자 아닌 사람과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내세우며 경쟁하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굳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게 살면 내세의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착함과 윤리적인 삶을 보시고 우리를 신자로 택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택하심의 기준이라면 가장 억울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착함과 윤리는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선택은 그런 기준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무조건적입니다. 창세 전에 택하시고 부르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불러내신 것뿐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10.~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9:10-13)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야곱과 에서가 이 땅에 태어나서 무엇인가를 하기도 전에 그들의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에부터 이미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착함과 윤리적인 그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일하심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르심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 지원서를 내거나 회사에 입사 원서를 낼 때 요구되는 자격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에 미달이 되면 원서조차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는 아무런 조건이 없기에 하나님이 택한 자를 예수님이 불러내신 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빛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빛이 되었으니까 빛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칭찬하는 윤리과 도덕적인 삶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빛의 자녀인 신자는 빛 안에 거한다는 그것으로도 이미 빛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빛이니까 빛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들이 신자로 하여금 강박관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도리어 구약의 율법주의와 같은 엄청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동전 하나라도 주지 않으면 빛의 자녀답지 않은 것 같은 생각에 붙들리고 결국 동전 하나라도 그의 손에 주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그런 것이 강박관념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믿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러한 행위를 항상 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것은 결국 엄청난 무게의 짐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이 행함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자가 착하게 살아서 자신을 선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면 분명 착한 행실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칭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감춰지는 것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악을 감추고 세상이 원하는 선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세상으로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자신이 의롭고 착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의로우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또 그래서 더욱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3. 빛의 자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는 분명히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행함은 무슨 의미인 것입니까? 사도가 말한 행함은 신자가 주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이나 윤리에 의한 행함이 아니라 주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성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신자나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나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없어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윤리와 도덕적인 것으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다른 것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에게만 있는 이 생명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생명을 가진 자로 세상에 존재한다면 생명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드러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생명이 있다는 것의 특징을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생명의 결과일 뿐 본질은 아닙니다. 즉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흔적일 뿐이지 꽃과 열매가 곧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생명 자체보다는 열매를 맺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빛을 비추고 짠맛을 내고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불태우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을 두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저주의 나라인 애굽에서 구출 받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땅에는 이미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죽음을 이긴 경험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장자의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재앙을 넘기고 애굽에서 빠져나온 생명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11장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11:8-9)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고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이며 이 실패로 말미암아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생명에 도달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인간의 무능함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의로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보내신 의가 곧 생명임을 깨닫고 그 의를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특징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무 단순한 얘기 같습니까? 하지만 인간의 습성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한다는 것이 말처럼 단순하고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빛의 자녀는 세상이 아니라 주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즉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계에서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성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을 알았고, 그분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온 인생 된 것이 바로 성공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의 신자는 세상에서의 실패가 낙심할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압니다. 세상에서의 실패로 낙심하고 자녀의 문제로 염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헛됨을 보게 하시고, 주 안에서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가를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키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을 통해서 죄를 보게 하시고 깊은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실패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날마다 예수님에게 붙들어 놓고 있음을 실감하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는 그것이야말로 빛의 자녀의 특성이고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라는 존재는 사라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 안에서의 나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내가 잘되고 성공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내 자녀가 잘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상실되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세계가 나를 덮친 상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착하고 의롭게 진실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삶은 빛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멍에를 같이 메고 살아가려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존재의 근본 토대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 속에서 희미해가는 예수님의 은혜를 다시 확보하면서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의 세계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신자는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원가족 여러분!!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고 합니다. 바울의 우리를 위한 일은 우리를 정결한 처녀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드려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3절을 보면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1:3)고 하여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오직 신랑 되신 그리스도만 바라며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뱀이 그의 간교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신부된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전함과 정결함을 버리고 부패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 부패는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11:4)라고 하여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아닌 나를 위한 복음과 나를 위한 예수를 만들어 따르는 것입니다. 신부된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2026년 한 해도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진실함에서 떠나 거짓된 것으로 살아가고, 깨끗함에서 떠나 더러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열심이 그리고 우리가 듣는 복음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고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하나님의 열심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은혜의 통치로 오직 주만 바라며 살아가는 2026년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 복습하기)
 

1. 윤리적인 삶이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갈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3.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이며 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4.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부르심은 어떤 부르심이며 또 그것에 대한 말씀의 근거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5.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행함의 종이란 무엇입니까?

 

6. 신자가 착하게 살아 자신의 선을 보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할 때 드러나는 두 가지는 무엇이며 또 그렇게 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한다고 합니까?

 

7. 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행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까?

 

8. 신자에게만 있는 생명의 특성은 어떻게 나타나며 또 그것이 단순하고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9. 빛의 자녀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신자로 하여금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10. 주 안에서 내가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그런 우리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만 결실케 됨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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